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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질 아블로는 그렇게, 그대로 흘러간다

2021-12-08 13:25:38
“디자인업계와 현실 속 세계를 특별히 구분하진 않아요. 그저 나 스스로가 두 세계에 완전히 몰두했으니까요”

정통, 방식, 편견을 거부했던 버질의 종적(蹤跡)은 2012년 밀라노에서 오프화이트를 설립했던 그 모습 그대로 패션 신에 새겨져 있다.

[박찬 기자] 11월 28일, 오프화이트(Off-White)의 수장이자 루이 비통(Louis Vuitton)의 맨즈 웨어 아티스틱 디렉터인 버질 아블로(Virgil Abloh)의 요절 소식이 들려왔다. 2019년 희귀병인 심장 혈관 육종을 진단받은 직후 여러 치료를 병행했다는 그. 암 투병을 하는 와중에도 왕성한 작업 활동을 펼쳤다는 사실에 더 큰 감정이 일기도 했다.
아프리카 가나 출신 이민 1세대인 버질 아블로는 패션 스쿨을 이수한 경험 없이 자신만의 성정과 열망으로 스트리트 패션&하이 패션 신에 등장했다. 실제로 대학의 전공도 패션과는 전혀 관련 없는 토목공학에 건축학 석사 학위. 스케이트보드 컬처, 힙합 뮤직 등에 열광했던 일리노이주 록퍼드 출신의 한 소년은 2010년 카니예 웨스트의 크리에티브 디렉터가 되었고, 그 오리지널리티는 2013년 오프화이트를 론칭하며 서서히 꽃피었다.

“저는 시카고 키즈(Chicago Kids)입니다. (루이 비통의 맨즈 웨어 디렉터로 임명됐다는) 사실이 여러분에게 마치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이 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2018년 3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루이 비통 아티스틱 디렉터가 된 그. 이는 단순히 루이 비통 브랜드의 역사를 넘어, ‘패션 브랜드의 남성복 라인을 이끈 아프리카계 최초의 인물’이자 ‘프랑스의 주요 패션 하우스 지휘권을 잡고 있는 몇 안 되는 유색인종 디자이너’라는 명망이 되기도 했다.
SPRING 2019 MENSWEAR

물론 버질은 그 명망의 가치가 결코 헛된 의미는 아니었음을 뒤이어 반증했다. 2018년 파리 팔레 로열 정원에서 열린 루이 비통 맨즈웨어 첫 번째 컬렉션에서는 플레이보이 카티(Playboi Carti), 스티브 레이시(Steve Lacy's), 에이셉 네이스트(A$AP Nast), 키드 커디(Kid Cudi) 같은 유스 컬처 아티스트들을 런웨이에 등장시키는가 하면, 3,000여 명의 아트 스쿨 학생을 초대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유통 관계자와 프레스, VIP 커스텀만을 초청해 독자적인 패션쇼를 진행하는 하이 패션의 관행을 비튼 것.

시사적 다양성을 재고한 듯 알록달록한 컬러 웨이는 무지개 볕이 되어 컬렉션에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패션 그룹 LVMH에서 나눈 프레스 인터뷰는 명확한 힌트 중 하나였다. “백색의 빛이 프리즘에 닿아 구성요소 색으로 나뉘는 것이 쇼의 출발점이죠” 실제로 화이트 더블 브레이스트 셋업으로 시작된 오프닝 룩은 시간이 지나며 여러 색상으로 변모했고, 모든 색상, 모든 국적, 모든 세대를 은유한 런웨이 쇼피스는 더욱이 화제가 되기 충분했다.
SPRING 2020 MENSWEAR

1주년 컬렉션을 맞아 센 강의 도핀느 광장을 막아 런웨이를 만들고, 카페 테이블을 객석으로 개조한 그. 연 만들기 세트로 구성된 인비테이션은 소년 시절의 추억을 더 했다. 쇼의 시작과 함께 들어선 파스텔컬러 착장들은 다양한 꽃들과 뒤섞여 조화를 이뤘다.

페일 핑크 컬러의 레더 셔츠, 레몬 컬러 팬츠와 스카이블루 블레이저 등 톤인톤 컬러 매치는 안정감을 불러왔고, 이는 스트리트 웨어에도 적용돼 반전적인 우아함을 선사했다.


버질 아블로의 사회적 메시지를 보다 풍부하게 보여준 컬렉션. 코로나 팬데믹을 맞아 디지털 파리 패션위크로 선보인 쇼는 스위스의 눈 덮인 산비탈에서부터 시작했다. 흑인 민권운동가이자 집필가인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의 에세이 ‘스트레인저 인 더 빌리지(Stranger in the Village)’에서 콘셉트를 따온 쇼는 3막 동안 작품의 배경 요소를 군데군데 재해석했다.


2021년, 11월 30일 마이애미에서 열린 버질 아블로의 루이 비통 마지막 컬렉션. 그가 41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루이 비통은 버질 아블로의 성명을 기리기 위해 ‘VIRGIL IS HERE’라는 제목의 프레젠테이션을 열 것이라고 발표했다.

자작나무가 둘러싸인 숲, 붉은색 대형 열기구 앞에서 선보인 컬렉션은 고전적인 실루엣의 착장을 필두로 다각적인 요소들이 새겨진 듯했다. 쨍한 블루 컬러 코트와 팬츠 안에 베이지 베스트를 덧입는가 하면, 눈이 시릴 정도로 과감한 네온 컬러 재킷 속에는 모노그램이 새겨진 후디를 갖춰 젠더리스적인 방향성을 보여주기도. “이것은 인식, 희망, 결단과 함께 나아가라는 나의 초대장입니다” 무대가 끝난 이후엔 그의 사망 전 선언문이 낭독되며 대단원을 정리했다.

끝으로, 한순간의 쇼는 버질 아블로의 아성을 정의하지 못한다. 물론 한 가지 옷과 액세서리로는 그의 존재감을 더더욱 설명할 수 없다. 패션계가 현대화를 시도하며 성장의 길을 모색한 가운데, 새로운 지표가 됐던 그 모습을 한 가지 초점으로는 지워내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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