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비즈니스

[bnt K-글로벌패션을 말하다] <1> 리틀 자이언트 휠라 제국, 부활을 꿈꾸다

2013-08-13 21:09:04

[기획취재팀] 2013년 1분기 연결매출액 전년대비 1% 감소, 영업이익 13% 감소, 4분기 연속 이익감소 지속, 매출액 7%감소, 영업이익 전년대비 40% 감소, 휠라 USA 영업이익 31%감소.

꼬리가 머리와 몸통을 삼켰다는 리틀자이언트의 신화를 남긴 휠라의 최근 실적이다. 휠라는 언제부터인지 스포츠 관련 뉴스의 협찬브랜드 정도, 내수 스포츠웨어 마켓에서는 ‘존재감 상실’을 맛보는 듯 하다.

반면 휠라의 재도약을 기대하는 수치들도 약간씩 모습을 비추고 있다. 내수 경기부진 속에서도 해외 사업부문에서는 개선 조짐이 확인, 휠라USA매출액이 9% 증가했으며, 해외 로열티 또한 12% 증가했고, 지분법 이익으로 반영되는 아쿠시네트(Acushnet)의 매출액이 전년대비 8% 증가하고 영업이익도 17% 증가했다. 휠라의 최근 양상이 밖에서 재미를 찾는 듯한 ‘이유있는 외유’로 보여진다.

2013년 3월. 세계적인 명문 예일대학교 MBA과정을 밟고 있는 미국과 유럽, 아시아권 학생 50여명이 한 회사의 사옥을 찾았다. 경영 구루(GURU)로서 이 회사의 대표에게 멘토링을 요청한 것. 학생들이 모여 앉은 강당에 약간 벗겨진 머리의 노신사가 들어섰다.


대표는 10여건이 넘는 M&A에 대한 경험담과 쏟아지는 학생들의 질문에 성심껏 대답하며 무용담을 전했다. 2시간여에 걸친 대화를 나눈 학생들은 대표의 진실하고 소탈한 멘토링과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극복한 그의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하며 예일대로 직접 초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예일대 학생들을 감동시킨 그는 바로 휠라 코리아의 대표 윤윤수 회장이었다.

이탈리아의 자존심 FILA

휠라는 처음 1911년 이탈리아 비엘라의 휠라 3형제에 의해 탄생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혁신적 가죽 처리법과 창의적인 패션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친척과 친구들을 모아 가내수공업으로 니트를 제작하던 휠라는 1923년부터 본격적인 사업체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1972년 스포츠카로 유명한 자동차 기업 피아트에 인수되면서 알프스 산맥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단순한 의류 브랜드가 아닌 세계적인 스포츠 레저 브랜드로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인수 이듬해인 1973년 지금의 필라 BI가 만들어졌다. 파랑은 차가운 포도주를, 빨강은 뜨거운 태양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의 자존심을 담은 컬러였다.


사람들에게 더욱 친근하고 강렬하게 다가가는 방법을 모색하던 휠라는 테니스 선수 비외른 보리에 주목한다. 1970년대 “스웨덴의 대표적인 수출품 세 가지는 볼보 자동차, 가수 아바, 테니스선수 보리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그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런 보리가 휠라의 옷을 입고 경기를 한다면 팬들은 그를 사랑하듯이 휠라를 사랑할 것이라는 전략이었다.

당시 테니스는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에서 발전된 스포츠로서 격식을 중요시하는 보수적인 운동이었다. 흰색 유니폼을 입는 것은 불문율이었고 유니폼에 광고하는 것도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그런데 1973년 최고 권위 테니스 대회인 윔블던에서 비외른 보리가 줄무늬 티셔츠을 입고 경기장에 등장한다.


휠라의 디자이너 피에르 루이지 롤란도가 디자인한 휠라 로고가 달린 유니폼이었다. 보리는 1976년 윔블던 첫 우승 이후 1980년까지 5연패를 달성했고 사람들은 스타와 함께 그가 입은 옷과 휠라 로고를 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 사이 획일적인 모양과 색상이었던 스포츠웨어는 컬러풀한 색상과 다양한 디자인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휠라는 보리 외에도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4개 봉을 무산소 등정한 산악계의 전설 라인홀트 메스너, 테니스 여왕 모니카 셀레스, 이탈리아 스키 영웅 알베르토 톰바 등 스포츠 스타들과 함께하면서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된다.

학자들은 미국 잡지 ‘광고시대(Advertising Age)’가 1978년 스포츠마케팅이라는 용어를 언급한 것을 근대적 스포츠마케팅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휠라는 개념조차 탄생하기도 전에 스포츠업계와 패션업계에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킨 스포츠마케팅의 원조였던 것이다.

스포츠 마케팅을 통한 휠라의 사회공헌

휠라코리아는 설립 초기부터 한국 스포츠문화 육성을 위한 투자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많은 스포츠선수와 연맹의 스폰서로서 인재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또한 사회와의 나눔까지 고려한 마케팅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다.

1993년 휠라여자오픈 골프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볼링, 농구, 축구, 스노보드, 마라톤, 테니스, 알파인 스키 등 스포츠 전반에 걸쳐 대회를 개최하고 후원해온 휠라코리아는 1995년에 12억 원이었던 스포츠 마케팅 비용이 1996년에는 22억 원, 1997년에는 40억 원에 달했으며 IMF 이후인 1999년과 2000년에도 각각 20억 원에 가까운 투자를 감행했다.

특히 2000년 8월 시드니올림픽에 출전하는 북한대표선수와 코치, 임원 등 54명에게 의류와 신발, 가방 등 용품 일체를 지원하는 사업을 벌여 천문학적인 액수로 평가된 국내 마케팅효과와 ‘스포츠마케팅의 승리’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휠라코리아 관계자는 “유니폼 7만 달러와 각종 용품 등 2억 원 정도가 들어갔지만 마케팅 효과는 10배 이상”이라며 “북한 내부의 평가도 좋은 것으로 알고 있다. 시장 선점 효과와 스포츠를 통한 휴머니티즘 전달이라는 점에서 휠라가 얻은 브랜드 가치를 포함하면 파급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휠라는 이 사업으로 2001년 2월 북한 평양 빙상관에서 열린 '백두산상 국제 피겨 대회'에 첫 상업광고를 내걸기도 했다.

2010년 10월에는 윤윤수 대표와 당시 휠라스포츠의 전속 모델인 이효리를 비롯 1000명의 산악인들과 함께한 기부 산행을 진행, 등반 참가비 전액을 한국 심장 재단에 기부했으며 참가자들에게 쓰레기 수거용 봉투를 지급하여 환경보호를 실천하기도 했다.


2013년 5월에는 지리산 국립공원에서 등산객들과 함께 훼손된 지리산 촛대봉의 복원을 장려하는 ‘그린 캠페인’을 펼쳤다. 이는 휠라 아웃도어가 국립공원 환경보전을 위해 2011년부터 펼치고 있는 활동으로 등산객들이 지리산 국립공원의 거림골과 세석대피소에서 생명토를 흙 운반용 생분해 친환경봉투에 담아 촛대봉으로 직접 옮겨 뿌리는 행사였다.

휠라 아웃도어는 뛰어난 기술력으로 미국 암벽 등반가 알렉스 푸치오, 이탈리아 탐험가 엔리꼬 로쏘 등 해외 아웃도어 전문가뿐만 아니라 북한산 경찰 구조대, 서울산악연맹 등 국내 전문가들을 후원하고 있기도 하다.

휠라, 신발로 세계 정복을 꿈꾸다


‘샐러리맨의 신화’, ‘글로벌 전문경영인’, ‘돈버는 마술사(magic person)’, ‘글로벌 브랜드의 오너’ 모두 윤윤수 대표를 이르는 수식어다. 윤 대표는 자신의 인생은 절반 이상이 실패담 이지만 결코 포기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한다.

윤 대표가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게 된 계기는 96년 국세청에서 발표하는 종합소득세 납세 실적 87위에 오르며 화제가 되면서 부터다. 당시 연봉 18억원으로 월급을 받는 사장으로선 국내 최고 연봉이었다. 흔히 최고 경영자들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연봉 공개를 꺼리지만 윤 대표는 달랐다. 열심히 일해 떳떳하게 번 돈이기 때문에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사다난한 20대를 보내고 서른둘의 나이에 윤대표가 입사한 곳은 미국 유통업체 JC 페니. 삼성전자가 전자렌지를 처음 생산한 지 1년 만에 올린 수출 6천만 달러의 실적 뒤에는 JC페니의 ‘진 윤(윤 대표의 영어이름)’이 숨어 있기도 했다.

그곳에서 신발과 핸드백을 구매하는 일에 수완을 발휘하던 중 37의 나이에 신발제조업체 화승의 수출 이사로 스카우트됐다. 직급은 높아졌지만 일은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품질점검을 소홀히 하고 수출한 플라스틱 장난감 때문에 미국 시카고까지 날아가 거래처 사장 집 앞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고 대량 제작한 수출용 ET 인형이 저작권에 걸려 회사에 60만 달러의 손실을 입히기도 했다. 결국 이 일로 이사에서 물러난 뒤 1984년 미니 종합상사인 대운무역을 차렸다.


미국 출장에서 휠라를 접한 윤 대표는 한국에서 만든 신발에 휠라 상표를 붙여서 미국에 팔면 장사가 되겠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전 호머 알티스라는 미국인이 미국 내 휠라 라이선스를 획득한 것.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사업 파트너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알티스는 자금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윤 대표가 직접 미국 현지의 쌍용을 연결해 자금도 융통해 줬다. 남 좋은 일만 하는 격이었지만 묵묵하고 성실하게 임했고 윤 대표의 미국 이름인 ‘진 윤(Gene Yoon)’의 명성은 미국 내에서 높아져 갔다.

90년대 들어 미국에서 휠라가 신발 브랜드 부문 4위에 랭크되고 본업인 의류 매출을 뛰어넘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자 의류에만 주력을 기울이던 휠라 이탈리아 본사가 신발 사업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윤 대표의 제안이었던 신발이 브랜드의 주 사업이었던 의류보다 더 큰 이익을 회사에 안겨주는 황금알이 되어있었던 것.

결국 본사는 역 로열티를 지급하고 미국 내 사업권을 되샀다. 미국 소매업자들에게서 신발사업의 조언을 구하던 휠라 본사는 “진 윤을 잡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한결같은 바이어들의 말에 1991년 휠라코리아를 설립하고 그를 연봉 100만 달러의 사장으로 채용했다. 당시 한국 실정으로는 상상도 못할 파격적인 인사였다.

휠라코리아를 시작한 윤 대표는 본사에 1년간 신발을 공급한 대가로 받는 소싱커미션을 운영자금 조로 매년 초 미리 달라는 요구를 했다. 다소 무리한 제안이었지만 뜻밖에 쉽게 허락했다. 현찰로만 100만 달러의 자금이 확보됐고 자금 회수기간이 6개월은 걸리는 의류신발사업에서 휠라코리아는 운영자금 걱정 없이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칠 수 있었다.

출범 초기 한국에 진출한 타 브랜드에 비해 브랜드 인지도가 앞서지 못했던 휠라코리아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본사의 지지와 윤 대표의 과감한 결단 덕분이었다.


Made in Korea. 품질만이 살길!

70~80년대 황금기를 구가하던 한국 신발 산업은 치솟은 인건비로 사양길로 접어들고 인건비가 싼 중국이나 동남아로 옮겨가고 있었지만 휠라코리아는 국내 생산을 결심한다. 당장 눈에 보이는 원가절감보다 품질과 재고관리에 효율적인 방식을 택한 것이다.

한국의 제품 생산 기술이 더 뛰어나므로 제품의 불량률을 낮출 수 있고 제품 생산기간을 줄여 수시로 변하는 시장반응에 맞춘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하므로 훨씬 더 이익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휠라는 브랜드 사업으로는 드물게 일찍 전산화를 추진했다. 제품의 판매실적, 반품 등을 수시로 확인할 수 있게 되자 이 수치를 데이터화 하여 제품 기획과 생산에 즉시 반영하는 QRS(Quick Response System; 신속 대응 시스템)를 도입했다.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제품을 기획하고 생산하는 휠라코리아는 아이템별로 소량 생산해 제품별 판매 실적, 반품 수량 등을 수시로 확인한 뒤 잘 팔리는 제품만 생산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대리점별 재고 이동도 빠르게 이루어져 재고를 현저히 줄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생산 제품의 절반만 정상가에 팔아도 성공한 장사라고 하던 한국시장에서 휠라코리아는 신제품의 80% 이상을 정상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었다. 일부 예외상품을 제외하고 ‘노 바겐세일’ 정책을 고수하면서 브랜드 명성을 지킬 수 있었다.

휠라코리아는 자체 생산을 하지 않고 중소 협력업체를 통해 제품을 공급받았다. 전산화를 통해 나온 수치로 정해진 기준에 따라 성적이 좋은 공장에 더 많은 상품대금을 지급하고 기준 이하의 공장은 거래를 끊었다. 협력업체 스스로 철저한 품질관리에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다.

또 글로벌 브랜드들이 각 나라의 체형이나 시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동일한 제품을 전 세계에 시장에 출시하는 정책으로 많은 폐해를 낳을 때 휠라코리아는 이탈리안 고급 스포츠 브랜드의 정체성은 유지하면서 국가별, 인종별 체형과 문화를 고려한 제품을 생산했다.

대리점 관리에도 엄격한 기준을 세웠다. A급 상권을 가진 점주들이 본사의 방침에 따르지 않고 횡포를 부리면 과감하게 거래를 중단했고 신규 대리점은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일반적 거래 관행보다 더 좋은 이익을 제시하고 매장의 청결도, 인테리어나 디스플레이 등으로 성적을 매겨 생산업체를 상대로 시행했던 인센티브 제도도 도입했다. 또 아무리 입지조건이 좋은 곳이 있더라도 기존 대리점 상권을 위협할 것으로 판단되면 절대로 대리점을 내주지 않았다.

휠라는 본사 직원들이 부패를 일으키지 않도록 급여와 인센티브를 충분하게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 회장의 이같은 조치는 ‘월급도 많이 주지 않으면서 부패구조만 없애라고 하는 것은 모순된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충분한 보상으로 부패구조가 자리 잡을 수 있는 환경부터 없앤 것이다.

윤 대표는 늘 페어플레이 정신을 강조한다. 진실성, 성실성 및 페어플레이 정신이야 말로 인생의 모든 분야에서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삶의 기본 원칙이라고 생각하며 정도 경영의 길을 걸어왔다.

휠라 코리아는 시장 진입 첫해인 1992년 매출 120억원을 기록하고 이듬해는 100%의 신장세를 기록했다. 2000년에는 1470억 원을 기록, 10년 만에 회사매출을 10배로 키웠다. 이러한 성장의 원동력은 정직이라는 그의 원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발에서 이너웨어 스포츠 아웃도어 까지

인지도가 높아지자 휠라코리아는 타깃층을 세분화한 본격적인 라인익스텐션을 전개했다. 1997년 이너웨어 브랜드인 휠라인티모를 시작, 2000년 ‘휠라키즈’로 아동복 부문에 참여했다. 2001년에는 젊은 층을 타깃으로한 휠라골프를 론칭했다.


2008년에는 대형마트를 겨냥한 이너웨어 브랜드 휠라티바를 론칭하면서 마켓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다. 2010년에는 휠라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6번째 브랜드 휠라스포트(현 휠라아웃도어)를 론칭했다.

휠라스포츠는 2013년 봄 시즌부터 휠라아웃도어로 브랜드 명을 변경했다. 새 브랜드명은 라인홀드 메스너를 후원해 온 모회사의 철학을 계승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고기능성에 초점을 맞춰 전문 상품군을 확대, 아웃도어 브랜드로서 정통성을 확립하는 한편 기존 휠라스포츠의 감각적인 디자인은 이어나간다. 수년간 계속된 국내 아웃도어 열풍이 식을 줄 모르고 고공행진을 계속하면서 패션사업의 필수 사업군으로 대두하자 정통 아웃도어 브랜드로서 새로운 도약의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10여 년 전 백화점 골프·스포츠코너의 구색 맞추기용 등산복 매장에 불과했던 아웃도어가 이제 ‘대한민국의 유니폼’으로 일상생활에 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등산복 같은 트레킹의류로부터 조깅복, 자전거, 수상스포츠 등의 다목적 스포츠 의류까지 아웃도어의 영역이 확장되었고 스트리트 패션이 스포티즘 디자인 트렌드와 융합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굳이 주말의 산이 아니라도 형형색색의 아웃도어를 입은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계속되는 경제 불황으로 상대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산이 레저나 여가 활동지로 각광받으며 일어난 붐으로 보인다. 거기에 소비자들의 과시욕이 편승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13년 아웃도어 시장은 6조4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세계 1위 아웃도어시장인 미국의 지난해 규모와도 맞먹는 수치로 국내 패션시장의 16%에 달하며 패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국내 아웃도어 시장의 급성장은 국내외 아웃도어 업계 관계자들조차 이상 징후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국내 아웃도어 열풍은 패션계에도 큰 지각 변동을 가져왔다. 골프웨어를 일상복으로 구매하던 중장년층의 수요를 아웃도어가 잠식한 것은 물론 백화점 매장까지 차지하며 골프웨어를 백화점에서 퇴출시키기도 했다.

기존의 아웃도어 브랜드에서는 연령대와 콘셉트를 세분화해 소비자를 공략하고 있으며 스포츠브랜드들은 아웃도어로도 손색없는 스포츠웨어라는 점을 강조하며 아웃도어 라인을 대폭 확장,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패션기업에서도 앞 다투어 아웃도어 브랜드를 론칭하고 있다. 큰 유행이 없는 남성복 업체들까지도 아웃도어용 기능성 원단을 사용해 제품을 생산하고 있을 정도로 전통아웃도어 브랜드, 스포츠 브랜드, 패션기업의 3파전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


또한 세계적으로 친환경 소비시대가 도래하면서 아웃도어에도 친환경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휠라코리아는 2012년 국내 의류업계 최초로 최고급 다운 인증마크인 ‘엑설런트 골드 다운(Excellent GOLD DOWN, 이하 GD)’과 친환경 제품 인증마크인 ‘에코 퀄리티(Eco-Quality, 이하 EQ)를 동시 획득, 2012년 하반기부터 제품을 출시하고 있어 친환경 비즈니스로의 발판도 마련해 놓은 상태다. GD와 EQ는 한국 제품 인정 기구(지식경제부 기술 표준원)로부터 인정받은 공인제품인증기관인 한국의류시험연구원(KATRI)이 주관하는 인증마크다.

휠라 vs 경쟁 스포츠 브랜드 ‘감성과 패션성에서 승부수 띄우다’


휠라는 경쟁브랜드인 나이키, 아디다스 등 경쟁 스포츠 브랜드에 비해 패션성이 강한 스포츠 패션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나이키나 아디다스가 본격 스포츠 브랜드로 기능성과 역동성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는 한편 휠라는 패션성이 강하고 이탈리아 태생의 브랜드로서 특유의 감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휠라 본연의 정통성과 패션스포츠 브랜드로서의 디자인력, 기술력과 친환경인증, 로열티 부담이 없는 국내 순수 브랜드라는 점이 합쳐진다면 휠라코리아의 전문 아웃도어 브랜드 런칭은 아직까지 해외 브랜드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국내 아웃도어 시장의 향후 주도권 경쟁에서 휠라코리아에게 유리한 위치를 안겨줄 것으로 전망된다. 적절한 포지셔닝을 통해 소비자의 니즈를 잘 충족시킨다면 현재의 스포티즘 트랜드에 맞춰 글로벌 1위의 브랜드가 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휠라아웃도어로의 브랜드명 변경은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해 전사적으로 추진 중인 브랜드 리프레시먼트(리뉴얼)의 일환이기도 하다.

휠라코리아는 브랜드 리프레시먼트의 성공적 전개를 위해 올해 초 세계적인 디자이너 지니 힐피거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했다.


지니 힐피거는 미국의 대표적 트래디셔널 브랜드 ‘타미 힐피거’에서 타미 맨즈웨어 라인부터 타미 진스, 타미 걸, 타미 우먼즈, 힐피거 H라인 등에 이르기까지 브랜드 핵심 라인을 성공시킨 주역으로, 뛰어난 디자인 감각과 탁월한 비지니스 리더십 모두를 인정받고 있는 디자이너다.

지니 힐피거는 휠라 브랜드 정체성인 ‘스타일리시 퍼포먼스’를 완성하기 위한 제품 및 이미지 개발과 함께 휠라 글로벌 제품군의 업그레이드 작업에도 참여한다.

최정윤 휠라코리아 상품기획부 상무는 “올해 전방위적인 브랜드 리프레시먼트를 통해 ‘스타일리시 퍼포먼스(Stylish Performance)’라는 브랜드 정체성을 확립하는 원년으로 만들 것”이라며 “지니 힐피거 영입으로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로서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휠라코리아는 단순 상품군의 전개뿐 아니라 신기술을 접목에도 박차를 가해왔다. 2010년 출시한 토닝화 이온(EON)이 미세전류 기술로 2010년 국제첨단신발기능경진대회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2011년에는 식약청으로부터 족부의 근육통 완화에 대한 효능을 인정받아 정식 의료기기로 인증받기도 했다.

2011년에는 여성용 토닝화 휠라 핏과 남녀공용 러닝화 버블런, 그리고 미국에서 높은 판매를 기록한 신개념의 베어풋 슈즈(맨발걷기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주는 토닝화) 스켈레토즈까지 최신 기술력을 접목한 제품을 지속해서 출시하며 소비자의 건강에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휠라 아웃도어에서는 2013년 상반기에 투습·방수·방풍 기능 돋보이는 고기능성 트레킹 방수 재킷, 베어풋과 등산화를 접목한 트레일 워킹화, 등과 가방이 직접 닿지 않는 OPTI-COMFORT 등판을 적용해 등에 땀이 차는 것을 방지하는 배낭 등, 고기능성 아웃도어 브랜드에 걸맞은 제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서울지사가 이태리본사를 삼켜


2003년, 윤 회장은 월급을 받는 샐러리맨에서 오너로 변화하게 된다. 윤 회장과 3명의 휠라 본사 임원, 미국의 케르베로스 캐피탈매니지먼트가 함께 지주회사인 서버러스컨소시엄(SBI)를 만들어서 외부자금 조달자와 협력해 기존 경영진이 사업을 매수하는 내부경영자 인수 방식(MBO, Management Buy-out)을 통해 휠라 본사를 인수했다.

다국적기업 현지법인이 그룹 본사의 사업부문을 역 인수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었다. ‘휠라’ 글로벌 본사는 이렇게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윤 회장의 SBI 지분은 3.5%에 머물렀고, 이에 2005년 200여 명의 휠라코리아 직원들이 퇴직금을 정산해 SBI가 가진 휠라코리아 지분을 완전히 사들였다. 직원들의 우리사주(기업의 종업원이 자사 주식을 취득 보유하는 것) 결성은 단 하루 만에 이뤄졌다. 이로써 설립 당시 100% 외국계 자본 회사였던 휠라코리아는 국내기업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2007년 수익악화로 경영난이 계속되자 SBI는 휠라 본사를 매각하기로 한다. 이에 휠라코리아는 자회사인 GLBH(Global Leading Brands House) 홀딩스를 설립하고, 글로벌 휠라를 인수하게 된다. 당시 글로벌휠라 인수 의향을 보였던 투자자는 총 8곳으로 이 중 2곳은 휠라코리아보다 더 높은 금액을 제시했다. 하지만 휠라 본사가 선택한 새 주인은 그동안 사업 파트너로서 신뢰를 쌓아온 휠라코리아였다.

새로운 터닝포인트 : 디아도라와의 독점 라이선스


2010년 7월 윤윤수 회장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스포츠 글로벌 기업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디아도라 스포츠(DIADORA SPORT) 엔리꼬 모레티 폴레가토 회장과 국내 독점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

1948년 이탈리아 트레비소 지역에서 탄생한 세계적인 디아도라 스포츠 브랜드는 축구, 사이클, 러닝, 테니스 등 특화된 분야에서 기능성과 세련된 디자인 감각으로 젊은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고 있는 브랜드다.

로베르토 바조, 프란세스코 토티와 같은 축구 스타를 비롯해 벤 존슨(육상), 보리스 베커(테니스), 비욘 보그(테니스) 선수는 디아도라와 함께 해온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로써 GLBH코리아 회장까지 겸임하게 된 윤윤수 회장은 “이탈리아 최고의 스포츠 브랜드인 디아도라와의 만남은 치열한 경쟁의 스포츠웨어 시장에 새로운 출사표를 던지는 또 하나의 도전”이라며 “다양함을 추구하는 젊은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건강한 스포츠 문화를 만드는 데 일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디아도라는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며 꾸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라이선스 비즈니스 이후 숨통 트여

사실 글로벌 휠라 인수는 득보단 실이 많은 결정이었다. 미국에서 매년 적자가 수천만 달러씩 쌓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은행에서 대출한 인수자금 중 상당액을 1년 이내에 상환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상황에서 그는 발상의 전환을 한다. 8%의 로열티 중 4%를 선로열티로 받아 차입금을 상환하기로 한 것이다. 대신 라이선시에게는 라이선스 계약을 평생으로 연장해 주었다. 서브라이선시와 공동운명체를 다짐하며 새로운 라이선스 비즈니스 모델을 제안한 것이다.

통상 서브라이선스 계약은 5년 단위로 이루어져 만료 후 재계약 여부가 불투명하다. 계약이 끝나면 언제든 상표권을 회수해 갈 수 있기 때문에 사업이 잘되어도 서브라이선시는 불안감에 큰 투자를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윤 회장이 내민 카드는 평생 재계약을 걱정하지 않고 비즈니스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었다. 윤 회장이 라이선스 비즈니스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발상이었고, 이는 향후 비즈니스를 키우는 데 주효하게 작용했다.


첫 번째 큰 숙제를 해결한 윤회장은 글로벌 휠라의 경영 정상화에 매진했다. 현재 휠라의 글로벌 비즈니스 형태는 GLBH 홀딩스가 상표권을 보유하고, IP홀딩스 컴퍼니가 휠라 룩셈부르크 지사와 라이선스를 관리하고 있다. 미국과 EMEA(EUROPE Middle East Africa)지역은 자회사 형태로, 브라질, 이르헨티나 등의 라틴 아메리카등 남미지역은 Dass그룹과 장기 라이선스계약을 통해, 중국과 아시아권은 중국과의 조인트 벤처 형태로, 이 지역을 제외한 주요 시장은 라이선스 계약을 각각 체결해 전개하고 있다.


또 다른 발상의 전환은 짝퉁 소굴에 들어가 진품 공장을 차린 것이다. 윤 회장은 휠라 본사를 인수한 후 중국 내 생산거점을 광저우에서 진장으로 옮겼다. 진장은 중국에서 신발산업이 가장 먼저 꽃피운 곳으로 중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짝퉁 생산기지 이기도 하다. 브랜드 비즈니스 세계에선 지양하는 곳이었지만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덮치면서 진장으로 들어갔다.

진장에서의 생산비용은 광저우의 절반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품 공장이 들어선 후 진장 일대의 짝퉁 휠라를 만드는 공장은 전부 생산을 중단했다. 이 브랜드 짝퉁 청소를 하게 된 격이었다.

휠라코리아가 제조공장을 직접 소유하지 않는 이유는 시장의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 ‘브랜드 비즈니스는 자유로워야 한다’는게 윤 회장의 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아디다스 제치고 아쿠시네트 인수성공


2010년 유가 증권에 상장된 휠라 코리아는 첫날 7만 원으로 시작했다. 공모가인 3만 5000원의 2배에 달했고 주당 8,500에 우리사주를 받은 250명의 직원은 주식평가액이 8배 이상 뛴 것이다. 휠라코리아의 유가증권 상장은 국내 패션업계 사상 글로벌 브랜드를 보유한 기업의 최초의 기업 상장이었다.

한편 휠라코리아는 2011년 7월 세계적인 기업인 독일의 아디다스그룹과 일본의 스미토모고무 등을 제치고 미국 골프용품 업계의 상징적 기업인 아쿠시네트(Acushnet) 인수로 또 한 번 주목을 받는다.

아디다스 그룹이 높은 인수가격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휠라코리아가 인수에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 포인트는 향후 성장의 중심이 될 아시아 시장에서의 영업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과 구조조정을 최소화하며 독자경영을 유지하겠다는 제안이었다.

전략투자자 휠라코리아와 재무투자자인 미래에셋 PEF가 힘을 합쳐 인수한 아쿠시네트는 세계적인 골프용품 1위 브랜드인 타이틀리스트와 풋조이 등 을 보유한 기업으로 한국 M&A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다. 이는 골프다이제스트의 ‘2011년을 달군 용품 관련 10대 뉴스’ 4위에 올랐으며 2012년 세계적 금융전문지 파이낸스아시아의 ‘2011 베스트코리아딜’로 선정되기도 했다.

윤 회장은 미래에셋에서 아쿠시네트 인수를 제안했을 때 세 번이나 거절했다고 한다. 2007년의 휠라글로벌의 여파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도전에 선뜻 나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계 1위의 골프용품 업체라는 점과 중국에서 성장하고 있는 스포츠 시장의 잠재성을 고려한 결과 그 엄청난 비전에 도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인수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필라 본사 인수 당시 수많았던 딜과 그것을 경험하면서 생기 끈끈한 팀워크가 큰 도움이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편 윤 대표의 이러한 끝없는 도전과 리더십은 2012년 언스트앤영 최우수 기업가상(Ernst & Young Entrepreneur Of The Year)을 수상하며 전 세계적으로 더욱 인정받게 된다. 언스트앤영 최우수 기업가상은 글로벌 회계·컨설팅 법인 언스트앤영 한영이 혁신과 창조로 가능성을 넘어 성공을 이뤄가는 모범적인 기업가를 선정해 수여하는 상으로 윤윤수 회장은 시상 부문중 최고 영예인 마스터상을 수상했다.

해외기업M&A 팽창속 내수는 뒷전?


현재 휠라는 세계 70여 개국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연매출은 약 1조 2000억 원규모다. 비록 아쿠시네트의 부채로 인해 올해 1분기 성장률은 잠시 주춤하고 있지만 지난 글로벌 사업권 인수에서 보여준 미국경영의 빠른 정상화와 중국시장에서 펼치고 있는 공격적인 영업 확대를 봤을 때 이번에도 예상보다 빠른 회복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골프가 2016년부터 다시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예정이어서 증권계에서는 골프 산업에서 휠라코리아의 잠재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PGA, LPGA 등 세계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브랜드를 한국 기업인 휠라코리아가 보유함으로써 기업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스포츠마케팅을 통한 한국의 국가 인지도를 한층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는 것.

2014년 24억 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려 세계 4위 스포츠 브랜드에 진입을 향해 달려가는 휠라, 해외 기업M&A를 통한 깜짝쇼가 또 어떤 부문에서 튀어나올지 기대된다. 반면 비좁고 치열한 경쟁구도의 내수 시장에서 휠라의 브랜드 선호도가 날이 갈수록 뒤처지는 양상이다.

올해 국내 모든 휠라 매장의 인테리어 디스플레이 전환, 스포츠와 연예계를 통한 적극적인 스타마케팅, 신발로 흥한 휠라의 전성시대를 되찾기 위한 신발부문의 강화, 국내 온라인 유통사업에 대한 재정비와 인력구조 재편 등 안간힘이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전설로 평가받았던 휠라가 다시 국내외 충성고객들에게 환영받는 휠라로 환생하길 기대한다.


(작성: 홍지혜 기자, 이지윤 기자 / 사진출처: 휠라코리아, Classic Kicks, Korea Rundschau, 아쿠시네트코리아, 디아도라 홈페이지 캡처, bnt뉴스 DB)

[휠라 연혁]

1923 본격 사업체의 모습 갖추며 FILA 설립
1972 스포츠 레져 브랜드 도약
1973 BI 완성, 제2의
1976 스포츠 마케팅 시작
1980s초반. 스포츠화 생산
1991. 7 휠라코리아 창립
1992. 3 국내 33개점(대리점18, 백화점15) 내수 영업
1992. 5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사무소 설치
1992. 12 산업포장수상
1993. 6 한국 섬유공업상 수상
1994. 4 중국 청도 사무소 설치, 신발 소싱 업무 개시
1994. 12 물류센터(경기도 화성) 완공
1995. 1 휠라 클래식 런칭
1996. 3 휠라 스포츠 런칭
1996. 7 제2물류센터 완공
1997. 11 휠라 인티모, 휠라 코스메틱 런칭
1998. 3 사옥 착공
1998. 5 휠라 오픈 골프챔피언쉽
1998. 9 휠라, 휠라 클래식, 휠라 스포츠 브랜드 통합
1999. 1 사옥 이전
1999. 4 제1회 휠라컵 직장인 축구대회 개막
1999. 5 홈페이지 오픈
1999. 5 제1회 아마추어 골프대회 개막
2000. 2 휠라키즈 런칭
2000. 3 납세자의 날- 대통령 표창 수상
2001. 2 휠라 골프 런칭
2001. 12 울주 물류센터 착공식
2003. 4 휠라 페라리 런칭
2003. 6 휠라 본사(이태리) mbo, sbi 창립
2004. 1 명동 직영점 리뉴얼 오픈
2005. 2 휠라코리아 MBO
2006. 3 뉴욕 메디슨가에 플래그십스토어 오픈
2006. 7 창립 15주년 기념식
2007. 1 휠라 글로벌 사업권, 상표권 인수 계약 체결
2007. 8 패스포워드 캠페인 전개
2007. 12 미국 백화점 코올스 판매계약 체결
2008. 3 웜블던 챔피언쉽 신발 공식 협찬사
2009. 4 휠라 밀라노 꼬르소꼬모에 플래그십스토어 오픈
2010. 1 휠라스포츠 런칭
2010. 3 휠라스포티 패션쇼 개최
2010. 4 윤윤수 회장, 이탈리아 비엘라시 명예시민 위촉
2010. 7 GLBH KOREA 디아도라 브랜드 국내 독점 라이선스 계약
2010. 9 휠라코리아 코스피 상장
2011. JD SPORTS FASHION plc.와 신규 라이선스 계약 체결
2011. 7 휠라코리아/미래에셋 PEF 컨소시엄 美 아쿠쉬네트 인수
2011. 8 국내의류업계 최초 KATRI EXCELLENT GD 마크 인증 획등
2011. 11 브랜드 탄생 100주년 기념 박물관 오픈 - 이탈리아 비엘라
2012. 2 휠라코리아 아쿠쉬네트 M&A, 2011 BEST Korea Deal 수상
2012. 5 윤윤수 회장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 공동의장 등재
2012. 6 업계 최초 최고급 다운 인증마크(GD), 친황경 제품 인증마크(EQ) 동시 획득
2012. 7 런던 휠라 글로벌 라운지
2012. 11 윤윤수 회장, 2012 언스트앤영 최우수 기업가상 수상
2013. 1 美 디자이너 지니 힐피거, CD로 영입
2013. 2 휠라스포츠, 휠라 아웃도어로 BI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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