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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nt k-뷰티를 말하다] <4> K뷰티의 원조 코리아나, 글로벌 뷰티로 부활을 꿈꾸다

2013-08-13 21:05:44

[기획취재팀] 지금은 한국 뷰티의 전성시대다. 동남아를 비롯 유럽과 미주 등지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이 바로 한국산 화장품. 그 중에서도 수십 년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화장품이 있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수많은 화장품 브랜드들을 뒤로한 채 이름 하나만으로도 굳건한 신뢰감을 주는 브랜드, 바로 코리아나다.

지난 24년간 여성의 아름다움을 위해 골똘히 노력한 만큼 40, 50대의 주부들에게 특히 더 선호되고 있는 브랜드라는 점은 코리아나의 제품력을 명실공히 증명하고 있다.


고객만족도 1위 기업상, 국가 고객만족도 1위 기업, 마케팅 대상 명품상, 한국인재경영대상 최우수상 등 다양한 수상 실적은 고객을 먼저 생각하는 코리아나에게 고객이 보여준 사랑. 이에 코리아나는 한국 여성의 외적인 미뿐만 아니라 내적인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온라인 뷰티 공간으로 여성 정보의 장을 이끌려고 한다.

국내 뷰티 브랜드 최초로 박물관, 미술관, 뮤지엄 카페 등의 문화 공간을 개관하며 기업과 소비자 간의 진정한 문화 교류를 시도하는 코리아나. 여성의 아름다움은 단지 외모만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보내면서 내적인 아름다움까지 추구하고 있는 그들의 뷰티 스토리를 들어보자.

혁신과 개혁을 향하는 서른다섯의 젊은 이사

1988년 11월, 서울 종로에는 다섯 명의 영업사원이 일하는 작은 사무실이 있었다. 규모가 작았던 이 회사를 오늘날 코리아나 화장품으로 키운 것이 바로 유상옥 회장이다.

유상옥 회장은 1959년 동아제약 공채 1기로 입사하였다. 당시 동아제약은 최고의 명문이었지만 재무구조와 판매이익은 다른 제약회사와 다를 바 없이 취약했고 사내 분위기 역시 무기력함이 가득했다.

그런 가운데 입사한 유상옥 신입사원은 젊은 패기와 의욕으로 근면성실함을 보이며 사내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했다. 이런 그의 노력은 회사로부터 인정받아 고속승진의 열차에 올라타게 된다.

구매과장을 거쳐 서른다섯 살의 나이에 기획관리 이사까지 단기간에 올랐다. 하지만 그에 안주하지 않고 재고관리, 자재관리, 원가관리 등으로 변화와 혁신을 일으켰다. 결국 경영진으로까지 발탁, 그의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될 라미화장품의 경영을 맡게 된다.

라미화장품은 1976년 동아제약이 리리화장품을 인수하여 설립한 계열사로 유 회장 부임당시에는 명맥만 이어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의 경영능력을 믿고 맡긴 회사였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엄청난 적자에 유 회장도 암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사원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며 모든 열정을 쏟았다. 주력 제품이던 라미네 방문판매 조직을 확대하고 신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경영 4년차인 1981년 탄생한 브랜드 ‘라미벨’이 대히트를 거두면서 라미화장품의 회생에 날개를 달아준다.



1978년 22억에 불과했던 라미화장품은 1979년 40억, 1980년 64억, 1981년에는 100억 원을 달성하면서 흑자전환 하게 된다. 그는 결국 라미화장품을 매출 500억 원대의 공개법인으로 성장시켰다.

새옹지마의 기회

노태우 정권의 6.29선언 이후 라미화장품에도 노조가 결성되고 노사분규가 일어났다. 노조와의 임금협상에서 그룹내부의 인상 상한선 보다 높게 협상을 마무리 지은 것에 대한 책임으로 갑작스런 인사발령을 받게 된다. 동아제약그룹내의 박카스병 납품업체인 동아유리로 좌천 된 것이었다.

유 회장은 그때를 회상하며 “샐러리맨으로서 내가 꿈꾸는 사업의 이상을 실현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하게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힘든 시기를 함께 버텨온 전우들의 변모와 오너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자신의 한계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50대의 나이였고 동아유리는 자동화 시스템을 갖춘 안정된 회사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일에 대한 열정이 남아있었고 아직 할 일이 더 남아있다는 생각에 퇴사를 결심한다.

이후 프랑스 친환경 코스메틱 브랜드 '이브로셰'에 원료를 공급하는 프랑스인 필립 마셰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유 회장에게 이브로셰와의 제휴 사업을 제안했다.



그와는 라미화장품 시절 친분이 있던 터였다. 사업아이템을 고민하고 있던 차였던 유 회장은 이브로셰 본사를 방문해 한국 총 대리점 계약을 맺고 본격적인 창업을 준비했다. 이 인연은 이후 2009년 이브로셰를 재수입, 브랜드숍으로 선보이는데 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순조로운 창업 과정이었지만 단 한 가지, 사업 자금이 턱없이 모자랐다. 유 회장이 가진 금액은 퇴직금 1억원. 그러던 중 윤석금 웅진회장이 유상옥 회장의 상황을 알고 동업을 제의해 왔다. 한 조찬회의에서 만난 인연이 있었던 윤 회장도 화장품 유통업 진출을 꾀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던 것. 평소 경영이상이나 마케팅 스타일이 비슷했던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하여 1988년 코리아나의 전신인 ‘사랑스화장품’을 창업하기에 이른다.

창업 후 윤석금 웅진회장은 경영을 전적으로 유상옥 회장에게 일임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경영에 혼선을 주고 싶지 않았던 윤 회장의 현명한 결정이었다.

코에 점을 콕 찍으며 “코리아나”

처음 화장품을 수입해 되파는 무역회사 형태로 시작했으나 유상옥 회장의 마음속에는 세계적 브랜드와 견줄 수 있는 국내 명품 화장품을 만들겠다는 일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 창업 이듬해인 1989년 코리아나 화장품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경기도에 50평 규모의 공장을 세우고 직원들과 연구를 시작, 4개월 만에 첫 제품 ‘바블바블 샴푸’를 출시하기에 이른다.

처음 성적은 무척 저조했다. 소비자의 냉담한 반응 속에서 유 회장은 브랜드 이름을 알리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에 1991년 당시 최고 톱스타였던 채시라를 전속모델로 채용하고 현재까지도 코리아나의 대표 광고로 손꼽히는 과감한 TV광고를 기획했다.



코에 화장품을 찍는 제스처를 취하며 “코리아나!”라고 외치는 것이 TV 광고의 주 내용이었는데. 처음에 이에 대해서 주위에서는 고개를 내저었으나 결과는 말 그대로 ‘대박’이었다. 전월 대비 4배 늘어난 매출을 달성한 동시에 승승장구하기 시작한 것. 1993년 연 매출 1300억 원을, 1996년 매출 2000억 원을 넘어섰다.

또한 일등공신이 된 채시라가 코리아나의 15년 연속 전속모델로 활동하며 국내 화장품 업계의 최장수 모델로 기록되기도 했다.

빠른 소비자 니즈 파악과 차별화된 마케팅 전략의 성공: 원조 머드팩

1993년 출시된 코리아나의 머드팩은 3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며 창업 5년 만에 코리아나화장품을 업계 3위에 올려놓는다.

코리아나에서 머드팩을 출시하기 전까지 국내 화장품 시장에는 외국에서 수입한 사해 머드팩이 전부였다. 그 이외에는 오이팩이나 영양크림 등이 구색을 맞추며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사해 머드팩은 한국인의 피부에는 잘 맞지 않아 좀 더 특별한 피부 관리를 원하던 소비자들에게 국산 머드팩의 출시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일이었다.

또한 필 오프 타입이었던 외국 제품에 반해 워셔블 타입으로 개발해 사용방식의 편의를 증진시켜 코리아나 머드팩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차별화된 마케팅 역시 머드팩 성공의 요인이었다. 다양한 소비자층을 겨냥, 제품타입을 둘로 나눴다. 방문 판매용으로는 세라믹 패키지의 코리아나 머드팩을, 매장 판매용으로는 튜브타입의 아트피아 머드팩으로 유통 형태에 따라 구분을 두어 판매했다.



“진흙이 미인을 만들어요”라는 광고 카피와 함께 전속 모델이었던 채시라가 머드팩을 사용하는 장면을 연출한 머드팩 광고 역시 코리아나가 팩 시장을 주도하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머드팩은 출시 된 해에 조선일보가 선정한 ‘93년 10대 히트상품’에, 출시 5년 후인 1998년 조선일보 선정 ‘대한민국 50년 히트상품 50선’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며 그 인기를 입증했다. 팩 시장의 잠재성을 일찍 알아챈 유 회장이 거듭된 실패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주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포기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던 성과였다.

한편 코리아나 머드팩의 인기로 머드의 효능이 널리 알려지면서 보령 머드 축제가 탄생되기도 했다.

또 하나의 최초: 새로운 유통 방식을 개척하다

1989년 당시 화장품 판매는 방문 판매에서 종합화장품점으로 판도가 바뀌는 시기였다. 후발 주자였던 코리아나에게는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했다. 고심 끝에 유상옥 회장이 ‘직판’제도를 만들어냈다. 바로 새로운 유통경로의 개척이었다.



직판제도는 ‘화장품 아줌마’로 대표되던 방판제도와도 다단계 방식과도 달랐다. 일명 ‘뷰티플래너’라고 불리는 판매원들이 활약하며 매출이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윤 회장은 이들에게 화장품 전문교육을 비롯 소양교육과 매너교육 등을 이수하게 했다.



또한 단순한 판매원이 아닌 화장품 전문가로서 고객의 피부에 가장 적합한 제품을 제공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했다. 체계적으로 유통 전 과정을 운영했으며 현금거래를 원칙으로 정가 판매를 고수했다. 판촉 및 사은품은 반드시 자사 제품의 샘플로 제한했다. 이러한 영업방침은 지금도 고수하고 있다.



유 회장이 안착시킨 뷰티플래너의 개념은 화장품 업계 전체에 퍼져 화장품산업 발전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현재까지도 ‘뷰티 카운슬러’라는 칭호를 얻으며 뷰티전문가로서 활동하며 화장품 산업과 함께 발전해가고 있다.



윈-윈(win-win)의 이별

1998년 외환위기로 인해 윤 회장은 본래의 사업에 몰입하기 위해 코리아나의 지분을 전량 매각하기에 이른다. 처음엔 외국 기업과의 M&A 형식으로 시도하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국내 투자자들에게 매각, 유상옥 회장이 코리아나의 최대 주주가 되며 안정적인 경영권을 확보하게 된다.

매각 당시 코리아나화장품은 업계 2위의 기업으로 성장해 있었다. 매각당시 윤 회장은 10년 동안 화장품 시장에 진출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윤 회장은 투자자들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1999년 주식을 코스닥시장에 등록했다.

한국의 화장품 ‘Coréana’

코리아나는 1996년 CI를 변경하면서 영문 표기를 ‘koreana’에서 ‘Coréana’로 변경 한다.

우리나라의 외래어 표기가 원래는 ‘C’로 시작되었다는 점과 영문 ‘K’에 비해 ‘C’가 좀 더 여성스러운 이미지의 화장품 기업과 잘 어울린다는 판단에서였다. 또한 국내에서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수입 화장품 브랜드의 브랜드 명이 C로 시작하는 게 많다는 점에서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화장품 선진국으로서의 프랑스의 이미지를 차용하고자 악쌍을 넣어 ‘Coréana’로 로고타이프를 최종 변경하게 된다.

소비자와의 문화 소통 공간 : 스페이스 C

코리아나는 여성의 아름다움은 외적인 미보다 내면의 교양과 미적센스가 좌우한다고 생각하며 문화를 통해 소비자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유 회장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실험정신과 도전정신을 가지고 있다. 독특한 문화공간을 창출해 고객들과 뷰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유상옥 회장은 동아제약 사원시절부터 40여 년간 6,500여 점에 달하는 고미술품과 현대미술품을 수집하여 스페이스 C를 설립했다.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조예로 국립중앙박물관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2009년엔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맞아 200점의 소장품을 기증했다. 개인 소장품 기증인 1호였다. 문화계에 기여한 공로들을 인정받아 그해 말 문화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복합 문화 공간인 스페이스 C는 ‘살아있는 문화공간’, ‘살아있는 집’, ‘도심 속의 정원’의 콘셉트로 건축가 정기용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한국적 미감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미술관 박물관이다. 전통 화장유물이 전시되어있는 ‘코리아나 화장박물관’과 현대 미술의 ‘코리아나미술관’, 국내 최초의 뮤지엄 카페 ‘카페스페이스 C’, 옥상정원 ‘C 가든’으로 이루어져 있다.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은 한국 전통 화장 문화를 보존하고 널리 알리고자 탄생한 국내 최대 규모의 전문 화장 박물관이다.

유 회장이 1970년부터 소장해온 5,300 여점의 컬렉션을 기반으로 운영하고 있다. 전시장에는 천연화장재료를 비롯해 남녀 화장 도구, 화장용기, 장신구와 관련된 유물 2,600 점이 전시되어있다. 이를 통해 관람객으로 하여금 한국의 화장 문화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앞장서고 있다.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의 유물은 지난 2006년 한ㆍ불수교 120주년을 기념하여 가진 파리 전시회에서 프랑스 현지인들의 갈채를 받으며 한국 화장문화의 아름다움을 전파하기도 했다.

스페이스 C 1층에 자리잡은 카페 스페이스 C는 국내 최초로 작가가 디자인하고 아트 디렉팅을 시도한 뮤지엄 카페다. 스페이스 C의 교육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곳이기도 하며 카페 속 오픈 갤러리에는 대중이 함께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분야의 전시가 기획되고 있다. 또한 유니세프 아우인형, 유네스코 미지센터 등과 함께하는 전시를 마련하며 문화를 통한 나눔과 소통의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중국 진출로 뛰어들다

코리아나는 중국에서 현지화 전략과 브랜드 수출 전략을 함께 펼치고 있다.

1994년 코리아나는 중국업체와의 합자공장 형태로 중국시장에 발을 내딛었으나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 1년 여 만에 현지생산을 정리하고 무역거래를 유지하던 중 2004년 11월 코리아나 천진 유한공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중국 진출에 나섰다. 연 1000만개의 스킨케어 제품과 베이스메이크업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를 갖췄으며 한국의 연구원을 파견하여 개발기술을 공유하고 개발상담, 품질관리에 만전을 기했다.

코리아나의 중국 브랜드이름은 고려아나(高麗雅娜)로 코리아뷰티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싶은 유상옥 회장의 마음이 담겨 있다.

2007년에는 당시 코리아나의 에스테틱 계열사였던 아미아인터내셔날의 프렌차이즈 에스테틱 ‘미플’이 상하이 이마트 1호점을 오픈하며 중국 미용관리시장 까지 진출했다.

미플은 코리아나의 에스테틱 샵 전용 제품을 사용하고 이미 중국 현지에서 인기가 높은 ‘녹두’ 브랜드를 홈케어 상품으로 제공하며 중국시장 영업에 박차를 가했다.

2009년 미플은 마스터 프랜차이즈 형태로 베트남에 진출했으며 2010년 3월 중국의 백화수부미용집단공사와 업무협약을 체결 하는 등 활발한 해외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2010년 4월 코리아나가 보유하고 있던 아미아인터내셔날의 전 지분을 매각하면서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코리아나가 2008년 개원한 ‘코리아나 뷰티 아카데미’와 직영 피부관리숍 ‘세레니끄’가 성장함으로서 자사의 브랜드에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국제 품질 시스템 인증으로 글로벌 경쟁력 갖춰

코리아나는 2012년 4월 자체 브랜드를 보유한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중국 화장품 제조 시장에 본격 진출했다.

기존의 ODM, OEM 방식을 넘어 브랜드명 제공부터 스토리가 있는 화장품 라인 전체를 구축해 주는 P-ODM (Product - Original Development&Design Manufacturing)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수많은 히트 상품을 가진 화장품 브랜드이자 20년 넘게 자체 기술연구소를 운영해온 제조사로서 구축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기존의 기업들과는 차별화된 전략을 펼치고 있다. 한국의 브랜드력, 한국의 ODM, P-ODM 능력을 한꺼번에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 중국시장을 빠르게 공략하기 위해 공장 인프라와 시스템을 재정비하고 확대했다.

이에 힘입어 코리아나화장품의 천진유한공사는 올해 3월 ISO9001(품질경영시스템)과 ISO14001(환경경영시스템)을 동시에 획득하는 쾌거를 거두며 경쟁력 있는 법인 공장으로 변화했다.



중국 뷰티 시장의 규모는 236억 달러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하고 있다. 1인당 연간 지출액은 평균 18달러이지만 지난 10년 간 매년 30%의 성장세를 보였으며 매년 15%이상 꾸준히 성장하고 있어 뷰티 산업의 제 1수출국으로 전 세계가 중국 시장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 브랜드의 경쟁 역시 날로 치열해 지고 있다.

유학수 코리아나 대표이사는 "중국의 항노화 스킨케어 시장과 비비크림 시장이 가장 인기 있는 만큼 코리아나의 기술적 강점이 가장 잘 적용될 수 있는 시장이다"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코리아나는 올해 5월에는 중국 상하이리바이지사와 5년간 약 미화 4000만달러(한화 440억여원) 규모의 화장품 수출 기본계약을 체결, 중국시장에 부는 K뷰티 대열에 본격적으로 합류했다.

유 대표이사는 “코리아나는 중국에서 현지화 전략과 브랜드 수출 전략을 함께 펼치고 있으며 최근 수출 부문에서 좋은 성과가 보여 기대가 된다. 올해 인도네시아 수출 계약을 비롯해 홍콩, 태국, 미국 등에서도 코리아나 브랜드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만큼 해외시장 활성화에 더욱 매진하겠다”며 해외시장 강화에 대한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세계의 화장품 브랜드 코리아나

코리아나는 전통을 바탕으로한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신개념의 방문판매 유통방식으로 세계 40위에 올라선 국산 화장품 브랜드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업계 2위를 자랑하며 성장하고 있었지만 트렌드의 변화와 함께 우후죽순 생겨난 저가 브랜드숍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유학수 대표이사는 실적 만회를 위한 유통채널 개편을 선언, 브랜드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코리아나의 주력 유통방식인 직방판 판매에 집중하기 위해 백화점과 면세점 매장도 철수시켰다. 대대적인 투자를 위해 올해 3월 120억 규모의 단기차입금을 증가하기도 했다.

중국시장에서의 제조업 확대는 물론 국내 시장은 스타 모델을 앞세워 홈쇼핑 시장 공략에 주력하고 있다. 서인영과 공동 개발한 브랜드 ‘엣지핏’은 다수의 메이저 TV 홈쇼핑에서에서 한 달 내 5회 연속 매진을 기록하는 등 대박 행진을 펼치고 있다.



유 대표는 “새로운 브랜드 ‘라비다’를 집중 육성하고 ‘세니떼뷰티샵’을 통해 브랜드숍 시장에서 입지를 굳히겠다”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모델 김하늘을 내세운 새로운 브랜드 ‘라비다’는 지속적으로 신제품을 출시하며 신선함으로 소비자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세니떼뷰티샵은 브랜드숍의 장점을 갖춘 발전된 화장품전문점의 형태로 브랜드숍이 강세인 화장품시장에서 차별화를 시도하는 코리아나의 야심찬 계획이다. 코리아나 브랜드 뿐 아니라 타사 제품도 함께 구성되며 가격 역시 저가부터 중고가까지 다양하다.

코리아나, 美를 통한 행복을 전파하는 뷰티

유학수 대표이사는 2018년 까지 매출 1조원대의 종합뷰티서비스 그룹으로 제 2의 창업을 이뤄내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힌바 있다. 코리아나의 강점에 더욱 집중, 경쟁사와의 차별화를 통해 기업의 활력을 되찾겠다는 전략이다.

에스테틱 사업을 핵심으로 한 종합뷰티서비스 그룹으로의 비전은 전망이 밝을 수밖에 없다. 자사의 제품을 베이스로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미 중국에서의 미플 에스테틱의 사업의 경험과 노하우도 있다. 에스테틱숍의 국내 시장규모역시 2조원대에 가까우며 매년 10~15%씩 성장하고 있다.

코리아나는 유 회장의 경영 이념대로 창립부터 지금가지 부정한 부를 추구하지 않는 정도경영, 윤리경영을 펼치고 있다. 지난 24년 동안 순수 국내 뷰티브랜드로써 미를 통한 행복을 전파해온 코리아나. 여성의 가치를 존중하고 사랑해온 코리아나가 옛 명성을 되찾아 세계 속에 한국의 아름다운 화장 문화를 전파하는 글로벌 뷰티문화그룹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코리아나 연혁]

1988. 11 (주)사랑스화장품 설립
1989. 01 (주)코리아나화장품으로 상호변경
1990. 08 코리아나 마크 등록
1992. 12 한국포장디자인 대전, 퓨어셀 산업 포장부문 우수디자인상
1993. 12 한국능률협회, 머드팩 93히트상품 본상
1995. 11 수출 1백만불탑 수상
1996. 11 한국 무역협회 주최 `자기상품 수출 공로` 대통령 표창
1996. 12 우수화장품 제조 및 품질관리기준(CGMP) 인증 획득
1997. 03 납세 모범기업 부총리겸 재정 경제원 장관 표창
1997. 05 자회사 (주)아트피아화장품 설립
1997. 10 한국능률협회컨설팅 선정 기초화장품 부문 `97 고객만족도 1위
1999. 06 한국능률협회 엔시아화이트닝엘리먼트시럼 `99상반기 히트상품 본상
1999. 12 코스닥 등록
2000. 03 인터넷 여성포탈 (주)우먼드림 공동설립
2000. 04 자회사 (주)레브코화장품 설립
2000. 06 자회사 (주)레미트화장품 설립
2000. 08 코스닥 증권시장 2000년 상반기 우수공시 법인수상
2000. 10 오르시아, 아스트라, 디벨로 3개브랜드 한국산업디자인상 수상
2001. 02 한국 마케팅 대상 수상(광고, 판촉 부문 최우수 기업)
2001. 05 한국능률협회컨설팅 `디자인 파워 1위 브랜드` 선정(디벨로)
2001. 07 일본 고세와 합자회사 설립
2001. 10 한국 능률협회, 한국인재경영대상 최우수 기업 선정
2002. 01 조선일보 선정, 국가고객만족도(NCSI) 국내 화장품 부문 1위
2002. 05 한경 비즈니스 선정 `한국 100대 기업`
2002. 07 한국디자인진흥원(KIDP) 2002년 우수산업디자인(GD) 상품전 3개
브랜드 25개 제품 우수디자인 상품 선정, 한국 디자인 진흥원장상
수상 : 엔시아 티 플러스
2002. 12 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KAID), 한국산업 디자인상 수상
2003. 07 `엔시아` 한국마케팅대회 `마케팅기획상` 수상
2003. 10 국가브랜드 경쟁력 지수 여성화장품 부문 1위
2004. 05 2004년 대한민국 마케팅대상 신상품부문 명품상(자인) 수상
2004. 06 제6회 한경마케팅 대상 금상 수상
2004. 10 2004 브랜드 대상 수상(자인)
2004. 11 중국 현지법인 코리아나화장품(천진) 유한공사 설립
2006. 02 <코리아나> First Brand Award 2006 여성화장품 부문 대상 수상
2006. 07 2006 상반기 50대 우수 특허 제품 선정(자인 보정 에센스)
2006. 09 한국경제 2006 올해의 브랜드대상 수상(코리아나)
2007. 01 김남주 전속 모델 계약
2007. 02 제1회 엔시아 디자인 공모전 시상식
2007. 03 코리아나 소비자 불만 자율프로그램 도입 발대식
2007. 04 (주)아미아인터내셔날 계열사 편입
2007. 06 미플 중국 1호점 오픈
2007. 09 고품격 피부 관리샵 세레니끄 1호점 오픈
2008. 01 대표이사 사장 유학수, 김태준 취임
코리아나 학습 사이트, e-러닝 센터 오픈
2008. 02 CGMP 재인증(4차)
2008. 08 mSFA 시스템 도입
롯데백화점 본점 입점
2008. 09 (재)충북테크노파크 전통의약 산업센터와 전략적 기술협력 협약
2008. 11 코리아나 화장품 창립 20주년 기념식
코리아나 뷰티 인스티튜트 서초본원 오픈
2008. 12 장업계 최초 CCMS 인증 획득(공정거래위원회)
2009. 03 유상옥 회장, 개인 소장 화장 유물 300점 국립중앙박물관 기증
2009. 09 코리아나 뷰티 인스티튜트 평생교육원 설립
2010. 01 김소연 모델 계약(오브로)
한혜진 모델 계약
2010. 03 서우 모델 계약(세니떼)
2010. 12 CCMS 우수기업 재인증
2011. 02 한혜진 전속 모델 계약
2011. 04 서우 전속 모델 계약
2011. 12 김하늘 전속 모델 계약
2012. 05 중국 천진법인 ODM사업 출범
김유리 전속 모델 계약
2012. 10 유상옥 회장, 경영 에세이 출간 '성취의 기쁨을 누려라'
2012. 11 서인영 전속 모델 계약
2012. 12 라비다 갤러리형 팝업스토어 '셀광뮤지엄' 개최
2013. 01 CGMP(우수화장품 제조 및 품질관리기준) 획득
2013. 05 코리아나, 고용노동부장관 표창
중국 화장품 수출 기본 계약 체결


(작성: 홍지혜 기자, 이지윤 기자, 사진출처: 라미화장품 홈페이지, 유상옥회장 홈페이지, 코리아나 홈페이지, 코리아나 TV 광고 캡처, bnt뉴스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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