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터뷰] 목마른 이병헌의 ‘남한산성’이란 우물

2017-10-02 23:44:49

[김영재 기자] “장르가 다양해지면 해소될 것이다”

배우 이병헌이 영화 ‘남한산성(감독 황동혁)’과 함께 돌아왔다. ‘광해: 왕이 된 남자’와 ‘협녀: 칼의 기억’ 이후 그의 필모그래피에 기록된 세 번째 사극이다.

이와 관련 제작보고회에서 사회자 박경림은 이병헌에게 다음의 질문을 건넸다. “‘광해’ 이후 오랜만의 사극이다. 소감이 어떤가?” 이병헌이 답했다. “중간에 ‘협녀’도 있었다.” 아마 사회자가 ‘광해: 왕이 된 남자’를 콕 집어서 이야기한 이유는 ‘천만 관객’이라는 딱지가 큰 비중을 차지했을 테다. 반면 ‘협녀: 칼의 기억’은 약 43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실패했던 바 있다.

한 번의 성공과 한 번의 실패. 이 가운데 이병헌의 사극 첫 성공작은 지난 2012년 추석 관객을 맞이했고, 마침 ‘남한산성’ 또한 2017년 한가위 개봉 채비를 마쳤다.

9월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북촌로5가길 한 카페에서 ‘남한산성’의 주인공인 이병헌을 만났다. 제작보고회와 언론시사회 모두 이마를 드러낸 얼굴과 몸에 딱 달라붙는 정장으로 한껏 멋을 냈던 그는 모자와 안경 그리고 청바지로 요약되는 외양으로 취재진을 맞이했다.

인터뷰어의 역량에 따라 인터뷰이가 대중도 기자도 만족할 수 있는 답을 내놓는 것이 정답이지만, 이병헌은 인터뷰에서 본인이 답할 수 있는 최선의 그리고 최대의 답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보였다. 이병헌의 연기야 명불허전(名不虛傳) 아니던가. 하지만 연기만큼이나 홍보에도 열을 올리는 그를 보니 최고의 배우는 역시 다르다는 생각이 스쳤다.


영화를 어떻게 봤는지 묻는 것은 인터뷰의 의례적 관문이다. 이병헌은 “‘감독이 정말 잘하는 사람이구나. 정말 똑똑한 사람이구나’를 느꼈다”라고 말했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영화다. 여러 가지로 흔들리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덤덤하게 잘 쌓아올렸다. ‘남한산성’이란 영화가 이 영화만의 색깔과 감성을 가지게 됐다.”

그는 ‘남한산성’에 출연하게 된 이유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을 언급했다. 이와 관련 ‘남한산성’은 1636년 겨울 조선의 왕 인조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에 갇혀 치열하게 47일간 항전했던 내용을 작가 김훈이 재구성한 소설을 원작으로 둔 영화다. 영화 ‘수상한 그녀’로 유명한 황동혁 감독이 각색과 연출을 맡아 소설을 스크린 위로 옮겼다.

더불어 이병헌은 감정이입의 대상이 백 번 이상 바뀌게 되는 영화라는 점이 시나리오의 매력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병헌은 영화에서 청(淸)과의 화친을 통해 공존을 모색하자고 주장하는 주화(主和)파 이조판서 최명길을 연기했다. 그리고 그의 반대편에서 배우 김윤석은 명(明)을 배신하는 것은 안 될 일이라며 화친을 배척하는 척화(斥和)파 예조판서 김상헌을 공연했다.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못하는 영화다. 문제점일 수도 있고, 매력일 수도 있다.”


두 배우의 연기 대립은 ‘남한산성’의 백미다. “이 영화는 한마디 한마디 대사가 그리고 두 사람의 말싸움이 어떤 액션 영화보다 치열하다고 느꼈다. 말싸움의 재미가 어떤 액션보다도 더 크게 다가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을 버리고 고개를 숙일지언정 나라와 삶의 지속을 주장하는 주화파 최명길과, 정반대 편의 척화파 김상헌 중 현대인의 지지를 받는 이는 지금의 상식과 맥을 같이 하는 최명길이다. 이병헌 역시 이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그 시대에 태어난 최명길은 혼자 역적이 되는 상황이었다. 어떤 시대를 타고나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중요하다. 절대적 진리는 없다.”

‘남한산성’에서 아마 대중이 기대하는 것은 인조가 청 황제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하는 장면일 것이다. 한 번 절하면 머리를 세 번 조아리고, 이를 세 차례 반복하는 청의 예법 삼궤구고두례. 혹자는 인조의 이마에서 피가 났다는 자극적 내용을 언급하지만, 황동혁 감독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라며 일축하기도. 그러나 기자는 ‘남한산성’에서 관객이 다음의 장면을 주목했으면 한다. 청의 공격을 온 몸으로 저지하는 최명길의 호소가 담긴 신이 바로 그것.

역사 속 인물 최명길 아닌 연기 잘하는 배우 이병헌이 온전히 돋보였다고 말을 건네자 그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하선을 언급했다.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는데, 감정은 그렇지 않았는데, 현장의 모니터를 보니까 ‘광해’의 하선이 보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에 휘둘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선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다른 식의 연기를 선택하는 것이 맞는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감정에 충실했다면 그것이 맞다’라는 믿음으로 연기했다.”


추석은 여름만큼이나 배급사의 눈치 경쟁이 치열한 때다. 여름 경쟁의 승리자는 우선 쇼박스였다. 쇼박스는 영화 ‘택시운전사’로 누적관객수 약 1천200만 명을 극장으로 모았다. 반면 경쟁사 CJ엔터테인먼트는 동시기 개봉한 ‘군함도’로 약 650만 명의 누적관객수를 기록했다.

이에 CJ엔터테인먼트는 ‘남한산성’으로 ‘택시운전사’와 마찬가지로 약 1천200만 명을 기록했던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영광을 재현코자 한다. 하지만 이병헌이 말했듯 ‘남한산성’은 영화 속 인물에게 감정이입이 힘든 영화다. 잘 만든 영화지만, 동시에 평론가만 좋아하는 영화가 될 수도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차별점이라고 생각한다. 다양성으로 다가갔으면 좋겠다. 화려하고 요란한 상업 영화에 지친 분들이 계실 것이다. 영화의 다양성에 대해 불만을 가지셨던 분들에게 분명 좋은 영화가 될 것이다.”

최명길은 어전(御前)에서 시종일관 격한 감정을 뿜어내는 김상헌과 달리 온화하고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다. 감성적 인간보다 이성적 인간에 가까운 인물이다. 청이란 태풍 앞에 놓인 조선의 생사기로에서 그는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 자신의 소신을 절대 굽히지 않는다. 역할과 배우의 동질성을 묻는 것은 인터뷰의 단골 질문이다. 이병헌은 자신의 성격을 우유부단한 인조에 빗대며 취재진의 웃음을 한 데 모은 뒤 결정 장애가 있다고 했다. 의자를 새로 구입해야 하는데 매장에 선택지가 너무 많으면 나중에 다시 오겠다며 선택을 포기할 정도. 선택은 그의 아내이자 배우 이민정의 몫이란다.


그런 그가 작품을 선택할 때 의지하는 것은 “그 시나리오가 마음을 움직였는지”라고. 감정으로 판단할 뿐 감독과 역할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이병헌은 강조했다. 하지만 예외 하나가 그의 필모그래피에 날아들었다. 2018년 상반기 tvN에서 방영될 ‘미스터 선샤인’이다. ‘태양의 후예’ ‘도깨비’를 집필한 김은숙 작가의 최신작에 이병헌이 출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매스컴과 대중은 그야말로 기대감과 궁금증을 동시에 드러냈던 바 있다.

“그 작품은 주변의 설득이 있었다. 작가님의 팬인 (BH엔터테인먼트) 손석우 대표가 제안했다. 솔직히 약간 당황스럽더라. 왜냐하면 드라마를 접하는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작가님의 특성을 잘 몰랐다. 그런데 손석우 대표뿐 아니라 주변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작가님의 대사나 글이 기가 막히고 좋다고 하더라. ‘그렇다면 작가님도 전성기가 있을 것이고, 나도 내 전성기가 지나기 전에 저 분의 말을 내 입으로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택하게 됐다.” 이어 그는 특이한 케이스라며, 김은숙 작가에 대한 걱정은 없지만 자신이 과연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을 드러냈다.

기자는 9월13일 배우 전도연의 영화 데뷔 20주년을 기념하는 ‘접속’ 관객과의 대화를 취재했던 바 있다. 이 가운데 행사에서는 전도연이 이병헌과 함께 호흡을 맞춘 영화 ‘내 마음의 풍금’과 ‘협녀: 칼의 기억’이 언급돼 ‘남한산성’ 언론시사회 일정을 앞두고 있는 기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와 관련 이병헌은 자신 또한 GV(Guest Visit)를 한다면 “‘달콤한 인생’은 빠지지 않을 것 같다”라며, 이외에도 ‘번지점프를 하다’ ‘매그니피센트 7’ ‘싱글라이더’ ‘내부자들’을 ‘이병헌 영화제’의 상영작으로 스크린 위에 상영하고 싶다고 말했다.


행사에서 눈길을 끈 것은 이병헌과의 연관성뿐만이 아니었다. 전도연은 “할 수 있는 게 뭔지 모르겠다. 다운되고 우울했다”라는 말로 충무로의 여배우 기근을 배우의 입으로 직접 언급해 충격을 불러 모았다. 다른 배우 아닌 전도연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다른 여배우는 얼마나 고민이 클지 상상조차 안 가는 대배우의 걱정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전도연 못지않게 많은 시간 배우로서 활동 중이고, 같이 호흡을 맞춘 배우로서 이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고.

“내가 그 입장이라도 답답할 것 같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우와, 정말 신선하다’라고 생각한 작품이 ‘싱글라이더’였다. 관객들이 이제는 목마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 쪽으로 유행이 치우쳐진 영화가 많았던 한 10여 년의 시간이 있었지만, 이제 약간은 목마를 때가 됐다고 느꼈다. 하지만 아직 나만 목이 말랐더라. (웃음) 장르가 다양해지면 해소될 것이다. 여배우와 남배우를 나누기 시작하는 지엽적으로 갈 것이 아니고, 장르의 다양성이 생기면 모든 문제가 조금씩 해결되지 않을까 싶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팠다. 하지만 우물은 만인의 우물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목마른 자는 다시 한번 새로운 우물을 만들어 모두를 기다린다. 우물 ‘싱글라이더’ 이후 ‘남한산성’이라는 또 다른 우물이 한가위에 왔다. 영화는 10월3일 개봉 예정이다. 139분. 15세 관람가. 손익분기점 500만 명. 제작비 150억 원.(사진제공: 퍼스트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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