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포없는리뷰] ‘버닝’ 스릴러 입은 이창동의 낯선 낯

2018-05-22 22:15:10

[김영재 기자] 5월17일 ‘버닝’이 개봉했다. 물론, 결말 ‘스포’는 없다.

★★★☆☆(3.7/5)

영화 ‘버닝(감독 이창동)’은 ‘제71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 공식 초청작입니다. 이창동 감독과 ‘칸영화제’의 인연은 깊습니다. 감독 주간에 초청된 ‘박하사탕’부터 각본상을 수상한 ‘시’ 그리고 본상 수상은 실패했지만 국제비평가연맹(FIPRESCI)상을 받은 이번 신작까지 프랑스 칸에서 상영된 작품 숫자만 총 다섯 편에 이르니까요. 재밌는 것은 이창동 감독이 세계 영화제를 지향하며 작품을 만드는 감독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영화 ‘오아시스’의 ‘베니스영화제’ 출품 관련, “영화제 나가려고 영화를 찍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던 바 있어요. 그리고 그는 작품을 통해 소통하고 싶은 대상으로 줄곧 국내 관객을 가리켜 왔죠. 그러니까 세계에도 통하는 소위 ‘이창동 월드’의 보편성은 대한민국이 시발점입니다.

영화 ‘초록물고기’ 때 이창동 감독은 산업화 가운데 점차 퇴색되는 가족의 의미에 집중했습니다. 사회의 폭력성을 막동(한석규)의 절절한 공중 전화 신으로 표현했고요. ‘밀양’과 ‘시’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에 집중했습니다. 희망이나 구원이 현실 속에 있다고 봤고, 시(詩)가 세상에서 어떻게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봤죠. ‘이창동 월드’가 새로이 주목한 대한민국의 무엇은 “젊은이”입니다. 제작발표회에서도, 칸으로 떠나기 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도, 심지어 칸에서도 그는 청춘(靑春) 대신 ‘젊은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를 배우 유아인, 전종서, 할리우드에서 온 스티븐 연(연상엽)이 연기했어요.

‘버닝’은, 작가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 집중한 ‘밀양’ 때처럼 원작이 있는 작품입니다. 이번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에 근본을 두고 있어요. 이창동 감독은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의 영화화를 NHK로부터 요청 받았다고 배경을 밝혔던 바 있습니다.

흡연이 낙인 주인공 종수(유아인)는 아르바이트로 삶을 전전하는 청년입니다. 배달 중간 만난 해미(전종서)는 그의 어렸을 적 친구고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 해미 대신 고양이를 돌본 “하나뿐인 친구” 종수는, 친구를 마중 나간 공항에서 벤(스티븐 연)을 만납니다. 해미의 “나이로비 동지”이자 “노는 것”이 하는 일이라고 하는 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나이예요. 예고편에선 ‘아프리카에서 만난 의문의 남자’라고 표현되더군요.

춤추는 해미, 하품하는 벤 그리고 꺼진 휴대폰 전원. 종수는 묻습니다. “혹시 해미하고 연락되세요?” 해미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짚고 넘어갈 점은 ‘버닝’의 장르입니다. 영화 ‘달콤한 인생’ ‘신세계’ 더 나아가 ‘차이나타운’ ‘아수라’ 이전에 ‘초록물고기’가 있었어요. 이창동 감독의 데뷔작은 분명 장르가 사나이의 피를 끓게 하는 누아르였습니다.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사랑을 더 쉽지 않게 다뤄보자’란 콘셉트 아래 ‘오아시스’에선 멜로를 시도했고요. 스릴러와 멜로. 정반대죠. 이후 한동안 드라마에 집중해온 감독은 약 8년 만의 신작 ‘버닝’에선 스릴러를 시도합니다.

안 어울릴 법한 이창동과 스릴러를 엮어주는 매개는 음악 감독 모그(Mowg)의 음악과,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입니다. 셈이 맞는다면 모그의 음악은 총 일곱 신에서 등장해요. 그의 음악이 등장할 때마다 관객은 침을 꿀꺽 삼키죠. 어둠 속을 달리는 트럭, 달리는 종수 곁에는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베이스(Bass)가 있습니다. 단 한 곡의 음악도 없던 전작 ‘시’와 비교하면 이런 변화는 천지개벽 수준이죠. 같은 감독이 만든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예요. 한번 시작된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버닝’은 원작 ‘헛간을 태우다’를 충실히 영상으로 옮깁니다. 물론 각색 하에 이뤄지는 일이에요. 원작에서 주인공은 일본에 거주 중인 서른넷 소설가로 소개됩니다. ‘버닝’ 주인공 종수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20대 미등단 작가고요.

또 하나의 의심은 이창동 감독과 오정미 작가가 각색한 소설에 있습니다.

‘벌레 이야기’를 각색한 ‘밀양’과는 다르게 ‘버닝’에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이 꽤나 짙게 배어있습니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재즈, 극 전반에 흐르는 허무주의 등이 그 예죠. 재즈와 허무만이 ‘버닝’과 전작을 구분하게 돕는 요소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닙니다. 그렇지만 ‘헛간을 태우다’는 일본 작가의 소설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먼저 용서를 꺼내는 ‘5.18 민주화 운동’ 후 현실을 비유한 ‘벌레 이야기’와, 한국에선 ‘헛간’이란 단어조차 낯선 ‘헛간을 태우다’는 비교도 불가능한 출발점이죠. ‘무엇이 더 낫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출발선이 다르다’의 문제예요. 폐부를 찌르는 시선 혹은 감독의 해설이 없음에도 머리 아닌 가슴으로 먼저 느낄 수 있던 그 무엇을 ‘버닝’에선 포기하길 관객은 강요받습니다.

스릴러를 입은 ‘이창동 월드’가 주목한 대한민국 보편성은 앞서 언급했듯 ‘젊은이’입니다. 이창동 감독은 그의 나이 듦을 언급하며 이제는 젊음의 문제를 객관적 자세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고 했어요. 또한, 요즘 세상 ‘젊은이’의 감정으로 공정하지 못한 세상이 안긴 무력감 및 분노를 언급했고요. 그래서인지 ‘버닝’에는 ‘젊은이’의 이야기가 다수 등장합니다. 싱크대 옆 변기, 늘 춥고 어두운 방,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청년 실업 상황이 나빠지는 나라 대한민국, 졸업했는지 묻는 어른, 외제차와 트럭 등.

하지만 ‘버닝’은 ‘젊은이’를 사용할 뿐입니다. ‘젊은이’를 극 전반에 내세우진 않아요. 왜냐하면 ‘버닝’의 출발점은 ‘헛간을 태우다’이니까요.

‘젊은이’의 이야기는 차곡차곡 누적됩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쌓이고 결부돼 결국 소설에는 없는 ‘버닝’만의 결말을 향한 도화선이 되죠. ‘버닝’은 해답이 없는 영화입니다.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랑을 더 쉽지 않게 다뤄본 ‘오아시스’ 이후 이창동 감독은 또 한 번의 악취미를 관객에게 전달합니다. 결말에 관해 이창동 감독은 “의미나 관념, 메시지를 주는 것 대신 감각과 이미지로 관객이 느끼길 바랐다”라고 했죠. 관객을 먹먹하게 만든 폐부를 찌르는 시선은 더 이상 없어요.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스크린의 미스터리는 세상의 미스터리와 연결됐습니다. 그래서 관객은 답을 얻는 대신 미스터리 자체를 받아들여야 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합니다. 낯설지 않은 이 기분은 뭘까요. 네, 영화 ‘곡성(哭聲)’이 떠오르는 순간입니다.

영상미가 속된 말로 ‘끝내주는’ 영화입니다. ‘곡성’ 홍경표 촬영 감독의 솜씨로, 특히 매직 아워를 배경으로 한 일명 ‘파주 노을 신’은 ‘버닝’의 백미죠. 이 신의 주인공은 해미입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해미 역을 거머쥔 전종서의 가치가 문자 그대로 밝게 빛납니다.

배우 김고은, 김태리와 비견되는 이 신인 배우는 ‘버닝’의 보물입니다. 왜냐하면 유아인과 스티븐 연은 베테랑 배우거든요. ‘칸영화제’에서 유아인은 “배우의 때가 벗겨지는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전종서는 카메라 앞에서 다른 배우를 가리면 안 된다는 것도 모르는 신인이고요. 발성 등 기술적인 면은 아직 배울 것이 많아 보입니다. 하지만 한 남자에겐 가슴의 두근거림을 다른 남자에겐 뼛속을 울리는 베이스를 안겨주는 해미 연기는 보통 재능으론 도달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그러나 스타가 될 수 있을진 모르겠습니다. 비관이 아니에요. 이창동 감독이 기용한 첫 신인 배우 문소리는 ‘박하사탕’ 촬영 이후 장편 오디션 대신 여러 졸업 단편에 그 이름을 올렸습니다. ‘오아시스’의 문소리는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공항 논란 등 이 신인 배우를 향한 언론의 관심은 매우 지나치고, 거대하고, 집요합니다. 과연 이창동 감독이 인정한 해미의 현신(現身)은 세파를 뚫고 배우가 될 수 있을까요. 기대보단 궁금증입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당당히 보여주겠다고 한 5월4일 기자간담회를 떠올려보면 그 누구보다 똑 부러지게 행동할 테지만요.

작품에는 반가운 얼굴이 등장합니다. ‘초록물고기’에서 폭력배 보스 태곤을 연기한 배우 문성근이 그 반가운 얼굴입니다. 더구나 ‘버닝’에서 문성근이 맡은 역할이 종수에게 취직이며 전공을 묻는 것은 ‘초록물고기’의 그것과 어딘가 닮은 면이 있어요.

‘초록물고기’에서 태곤은 막동에게 말합니다. “너 무슨 일 하고 싶어? 앞으로 커서 뭐 되고 싶어? 젊은 놈이 왜 그래, 인마! 잘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그, 어떻게 살라 그래? 젊은 놈이. 꿈이 있어야지, 젊은 놈이 말이야.” 2018년의 종수 그리고 1997년의 막동.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창동 월드’의 ‘젊은이’는 언제나 불확실을 걷는 중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무기력과 분노겠죠. 그때의 막동은 누구보다 깡다구 충만한 사내이자 ‘젊은이’였으니까요.(사진제공: 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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