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J기자의 설] ‘시동’ 그리고 양준일 (리뷰)

2019-12-22 01:03:38

|의미에 웃음까지 갖춘 ‘시동’…대단하다 마동석
|비록 성공 못 하더라도 나의 삶을 산 당신이 챔피언


[김영재 기자] 만약 인생이 물건이라면 그 물건은 환불이 불가능한 물건이다. 두 반항아 택일(박정민)과 상필(정해인)의 대화를 듣고 떠오른 생각이다.

상필은 오르막서 빌빌대는 택일의 시티 오토바이를 보고 언제 고장날지 모르니 빨리 환불하라고 아우성친다. 이를 맞받아치는 택일의 욕지거리가 재밌다. “아이 중고나라에서 산 걸 어떻게 환불해 이 븅신 새끼야.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어쩌면 그의 말에는 ‘태어난 이상’ 다시 무(無)로 돌아갈 길은 없다는 일종의 체념이 은유로 녹아 있다.

18일 인생과 그 인생을 살아 내는 군상에 주목한 영화 ‘시동(감독 최정열, 원작 조금산)’이 개봉했다. 정확히 말하면 ‘시동’은, 개개가 욕망을 갈구하는 이 지옥도에서 그가 위로 올라갈 수 있냐 없냐를 결정짓는 ‘업(業)’에 대해 말을 거는 작품이다.


▶어른의 탈을 쓴 꼰대에게 告함…꿈이 없어도 삶은 있어

택일은 집안의 탕아다.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라고 준 돈을 오토바이 사는 데 쓴 그는 진로 문제로 엄마 정혜(염정아)와 늘 옥신각신한다. “만 원으로 갈 수 있는 데 하나요.” 결국 엄마와 상필 모두를 등진 채 서울을 떠나 군산에 발을 내딛는 택일. 우연히 장풍반점에 배달부로 취직한 택일은 그곳에서 주방장 거석이형(마동석)을 만나는데…

그 업을 논하는 첫 시동은 ‘쓸모없다’와 ‘쓸모 있다’이다. 정혜는 왜 검정고시 학원을 다녀야 하냐는 택일에게 그렇게 그냥 쓸모없는 인간으로 계속 살 거냐고 묻는다. 이에 택일은 대학 등록금 낼 돈도 없는 엄마는 과연 그 쓸모 있는 인간에 해당되냐고 반문한다. 여기서 ‘시동’은 뇌리에 다음의 질문을 남긴다. ‘쓸모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돈인가?’

자, 다음 질문. 자신도 주방장이 되고 싶다는 구만(김경덕). 그가 택일에게 묻는다. 꿈이 무엇이냐고. 택일의 답은 ‘생각해 본 적 없다’이다. 이에 구만은 “그럴 수도 있죠”라는 대답을 무덤덤히 건넨다. 봤다시피 두 번째 시동은 ‘꿈’이다. 청년이라면 모름지기 꿈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는 ‘시동’에서 고릿적 이야기로 치부된다. 그래서 꿈도 없고 공부는 죽도록 하기 싫은 택일은, 하고 싶은 일만 하면 사람대접 못 받고 산다고 하는 정혜에게 이상한 짓 안 하고 사람답게 살 테니 엄마도 앞으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라고 부탁한다.

바야흐로 마지막 시동은 ‘어울리는 일’이다. 택일은 상필의 몰골을 보고 “어울리는 일을 해 좀”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꺼낸다. 대체 본인에게 어울리는 일이 무엇이냐며 짜증을 부리는 상필. 동화(윤경호)도 이방인도 관객에게 “어울리는 일”을 상기시킨다.

물론, 황금만능의 세상이다.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다면 결국 그 돈이 모자란 탓’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만인의 공감을 사는 때고, 지난 2014년 정유라는 그를 둘러싼 의혹에 “돈도 실력”이라는 말을 페이스북에 버젓이 올렸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만능이라도 돈을 잘 벌고 못 벌고가 쓸모 여부를 가리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될 일 아니겠는가.

꿈이 있고 없고도 그 기준에 부적합하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꿈이 뭐냐는 개그맨 유재석의 질문에 배우 김원희는 “큰 꿈은 없다”며, “목표가 뚜렷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했다. 사실 꿈은 청사진에 불과하다. 삶은 우여곡절의 연속이라서다.

그래서 ‘시동’은 꿈을 갖고 대학에 들어가 나중에 사람대접 받고 살라는 이 땅의 꼰대들에게, 그 대척점에 서 있더라도 잘못되기는커녕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썩 감성적으로 일깨우는 작품이다. 이는 감독도 인정한 바다. 그는 “영화를 보면 ‘어울리는 일을 아직 못 찾은 캐릭터’ ‘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캐릭터’ ‘하다 보니 어울리는 일이 돼 버린 캐릭터’ 등 다양한 캐릭터가 나온다”며, “어울리는 일을 찾으라고 조언하기보다 그것이 무엇이든 다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목적지(꿈)가 없어도 도착지(삶)는 있다. 수미상관까지 사용하며 ‘시동’이 강조하는 바다.


▶가히 ‘마동석 매직’…웃길뿐더러 든든하기까지

배우 마동석의 거석이형 역은 그 ‘인생에는 정답이 있다’를 논파하는 데 도움이 되는 큰 지렛대다. ‘시동’은 소위 ‘마블리’ 캐릭터가 어떤 창작자를 만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오롯이 생명력을 자랑하는 영물(靈物)임을 알리는 작품이 될 전망.

영화 ‘부산행’ 이후 그간 여러 작이 마블리를 차용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소모되고 말 것’이라는 예측에도 불구, 그 마블리가 이번에도 해냈다. 관객은 마동석이 등장할 때마다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린다. 그 웃음이 자연스럽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플러스알파도 있다. 경주(최성은)―배우 박정민은 인터뷰에서 택일이 경주에게서 엄마 정혜를 발견하는 신이 있었으나 본편에서는 아쉽게 삭제됐다고 비화를 밝혔다―가 엄마라면 거석이형은 공 사장(김종수)과 함께 아빠이자, 또 형이다. 군산 장풍반점에서 피어난 이 유사 가족은 비록 그 끝이 예견된 것과 별개로 혹 보이지 않는 미래에 떨고 있을 택일과 관객을 굳게 아우른다. 그 큰 덩치로 모두를 감싸 안는 마동석이다.


▶시대 요구에 소환된 양준일…가장 나답게 사람답게 카르페디엠

요즘 약 30년의 공백을 깨고 대중 곁에 돌아온 한 가수가 화제다. MC는 그를 무대에 소환하며 “20세기를 살아온 21세기형 천재”라고 소개했다. ‘리베카’ 양준일 이야기다.

대중은 미국에서 음식점 서빙을 하고 있다는 그의 소개를 듣고 시대의 몰이해에 아스러진 천재의 영화(英華)를 안타까워했다. 천하의 양준일이 서빙이나 하고 있다니. 아마 모두는 서빙 뒤에 조사 ‘-나’를 붙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터. 그에게 어울리는 곳은 무대고 또 어울리는 일은 그 무대를 뛰어노는 가수이기에 합당한 반응이었다.

양준일이 1991년 ‘어울리는 일’을 찾았고 2019년 그 일이 어울리는 때를 찾았다면, ‘시동’의 택일은 아직 ‘어울리는 일’도 못 찾은 햇병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또 목적지보다 출발이 우선이라는 그 접근은 아직 우리 사회에 어울리는 태도가 아니다.

28년. 양준일이 인정받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저는 계획은 안 세워요. 그냥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면 되니까요. 계획이 있다면 겸손한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만일 유튜브가 없었다면 그의 때는 영영 오지 않았을지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고 ‘태어난 이상’ 인간은 그 현재에 만족하며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야 할 의무가 있다. 통속, 과거, 미래 따위에 물들지 않고 지금의 그가 옳다고 판단한 것을 밀고 나가는 주체성 말이다. 그것이 바로 20세기 양준일과 21세기 택일의 공통점이 아닐까.

그렇기에 택일의 미래가 장밋빛이라고 예고하는 것은 아니다. 또 모두가 (사회적) 성공을 꿈꾸나 그 성공은 극히 일부에게만 허용된 오아시스다. 인간은 탐욕스럽고 어리석어서 시기하고 질투하면 본인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아수라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욕심을 버리는 것뿐.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자. 그리고 그저 사람답게만 살자. 위로 올라갈 수는 없더라도 작사가 김이나의 말대로 “존재가 아트”가 될지니. 15세 관람가. 102분. 손익분기점 240만 명. 총제작비 90억 원.

(사진출처: NEW, JTBC ‘투유 프로젝트-슈가맨3’ 방송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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