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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Talk] 요지 야마모토 “‘정직함’이라는 말은 정말 중요하다”

2014-04-14 09:52:09

[최원희 기자] “나는 등의 각도나 뒷모습을 매우 중시해 커팅 때도 뒷판부터 한다”

‘중성적이다, 어둡다 그리고 어렵다’ 이 세가지는 요지 야마모토 디자인의 전체적인 인상을 대변해주는 말이다. 하지만 그의 디자인 속에는 비대칭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정직함’이 녹아들어 있다. 화려한 앞모습뿐만 아니라 뒷모습까지도 세밀하게 디자인하며 완성도 높은 디자인을 선보이는 것.

요지 야마모토가 주목 받는 이유 중 하나에는 서양과 동양의 문명 충돌이라고도 여겨지는 이유도 있다. 디자인을 뛰어넘어 문화체계의 대결이라는 문제가 내제되어 있기 때문.

이는 일본 출신의 디자이너들이 서양 출신 디자이너들은 생각하지 못했던 시각의 디자인을 선보이며 수용과 동시에 창조적인 디자인들로 패션계에 한 획을 그은 이유에 대한 탐구의 출발선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 “완벽함은 추하다고 생각한다”

1943년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법학사를 취득하지만 패션에 흥미를 느껴 대학을 중퇴한다. 그리고 의상실을 경영하던 디자이너 어머니에게서 문화복장학원의 진학을 권유 받아 졸업하게 된다.

유일한 남학생이자 고학생이었던 그는 수석으로 그곳을 졸업하고 파리 여행에서 ‘프레타포르테’의 시대임을 깨닫는다.

그 후 양재사 어머니의 슬하에서 코스튬 피팅을 시작하게 되고 1972년 셔츠전문회사 Y’s를 설립하게 되는데 1977년 첫 쇼에서 파괴패션을 선보이며 구축적인 디자인과는 차별화된 디자인을 제시한다.

■ “프랑스 패션, 일본에서 스승을 찾다”


현재는 레이 가와쿠보, 이세이 미야케와 함께 대표적인 일본 패션 디자이너로 떠오르는 요지 야마모토. 그의 첫 해외 컬렉션은 당시 연인 사이였던 꼼므데가르송의 ‘레이 가와쿠보’와 이루어졌다.

1981년 크로우룩으로 국내 프레스들에게는 비웃음을 샀던 의상들을 파리로 가져가면서 대성공을거둔다. 또한 이를 계기로 미국과 파리에서 디자인 관련한 상을 수상하기도 하며 국내외적으로 입지를 넓혀나간다.

그 후 전위적 몽상가이자 역설적 패션디자이로 자리잡은 그는 화려하면서도 정확한 드레이핑과 페브릭의 믹스매치 그리고 하얀 분칠을 한 기괴한 모델을 이용해 꼼므데가르송을 론칭하면서 세계적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했다.

블랙 원단을 주로 사용하며 ‘상상 속 실루엣’을 위해 크고 과감한 그리고 아방가르드한 여성복 라인을 추구하는 요지 야마모토. 그의 과학적인 정교함은 훗날 준야 와타나베, 마르틴 마르지엘라와 같은 디자이너들에게 자극을 주는 원천이 되고 있다.

■ “역사나 전통을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을 잘 알아야 한다”


1980년 여성의 몸매를 강조하던 서구적 스타일과는 다른 탈중심주의적 의상을 내놓은 그는 완벽한 아름다움이 아닌 미완성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또한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빅룩으로 대변되는 요지 야마모토는 여성의 아름다움은 드러나는 실루엣이 아닌 ‘상상 속 실루엣’이라고 말하며 기존의 라인과는 다르게 자신의 트렌드를 구축한다.

옷의 예술성을 강하게 표현하되 실용성을 비롯한 기본적인 가치를 잊지 않는 출발선에서 수용과 창조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

마음 속 깊은 곳의 분노를 장 폴 고티에, 크리스티앙 디올, 파코 라반 등의 다양한 디자이너들의 스타일을 재구성해 표현하는 그는 미래의 디자이너들에게 자신에게 정직할 것을 권하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을 가장 잘 실천한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사진출처: 요지 야마모토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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