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터뷰] ‘장산범’ 염정아, 엄마가 만난 여름의 공포

2017-08-17 14:27:54

[김영재 기자] “지금 마냥 설레고 즐겁다”

엄마. 이 단어 하나에 누군가는 웃음을 짓고, 또 다른 이는 눈물을 흘린다. 엄마라는 단어가 전달하는 울림은 양면의 감정이기에 더 큰 진폭으로 다가올지도. 하지만 머릿속에 떠올릴 때 무엇보다 심적으로 가깝고 뭉클한 엄마는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에서는 가치가 틀려진다. ‘다르다’와 ‘틀리다’의 사용법은 확연히 다르지만, 이 경우만큼은 가치가 ‘틀려진다’.

엄마의 성적(性的) 배경을 바탕 삼아 단어 여배우를 불러내자면, 여배우는 엄마를 싫어한다. 정확히는 엄마 역할을 꺼려한다. 과거에는 극의 중심인 연인을 도맡다가, 극의 배경인 엄마가 되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는 것이 주된 이유다.

이와 관련 배우 염정아에게 다음을 질문했다. “염정아만의 엄마 역할이 가능한 이유가 궁금하다”라고. 그간 염정아는 다양한 엄마를 소화해왔다. 영화 ‘장화, 홍련’에서의 비밀을 감춘 계모, SBS ‘워킹맘’에서의 육아와 직장 사이 갈등하는 워킹 맘, ‘카트’에서의 비정규직 아픔을 아들과 공감하는 현실적 엄마까지.

돌아온 대답은 간결했다. “자연스럽다, 나는. 너무 당연한 것이고.”

더불어 그는 “결혼 전부터 엄마 연기를 했다”라며, “이 점에 대해서는 한 번도 거부감이 없었다”라고 답했다.

사실 인터뷰 당시 오해를 했다. 거창하거나 장황한 이야기를 싫어하는 배우의 성격 탓에 짧은 대답이 나왔다고. 실제로 그는 취재진이 평소보다 많은 수의 질문을 던지도록 만들었다. 답이 길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그의 대답이 두 눈에 꽂혔다. 염정아만의 엄마 역(役). 세간의 거부 아닌 당연을 생각했기에 가능한 입지가 아니었을까. 엄마를 긍정하는 염정아를 8월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팔판길 한 카페에서 만났다.


새 영화에서 염정아는 또 다른 엄마를 그려냈다. 영화 ‘장산범(감독 허정)’이다.

희연(염정아)은 시어머니(허진)가 앓고 있는 치매의 호전을 위해 장산으로 이사를 간다. 5년 전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서는 시어머니의 호전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까닭. 장산의 숲 속에서 등장한 낯선 소녀(신린아)는 어느새 희연의 마음을 위로하며 잃어버린 아들의 대체제로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어딘가 이상하다. 소녀의 목소리가 딸 준희(방유설)와 너무 흡사한 것. 게다가 자신의 이름을 준희라고 소개한다. 시어머니뿐 아니라 남편 민호(박혁권)까지 실종되면서 희연은 공포감에 휩싸인다. 무당이 지목한 범인은 바로 장산범. 그는 가족을 되찾기 위해 범의 소굴로 입장코자 한다.

미스터리에 휘말린 여자, 동시에 미스터리를 결자해지 하려는 엄마 희연을 염정아는 연기했다.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여자다. 그런 여자가 여자 아이를 만나면서 아들의 모습도 찾게 되고, 또 그 아이를 감싸 안고. 관객이 희연이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중점을 뒀다.”

이어 그는 부끄러운 듯 웃음을 지으며 “노력했다”라고 덧붙였다.

출연 배경을 물으니 김미희 대표의 이름이 나왔다. 영화사 ‘좋은영화’ ‘싸이더스FNH’를 거쳐 현재는 ‘스튜디오드림캡쳐’를 이끌고 있는 김미희 대표는 충무로의 대표 영화인 중 한 사람이다. “김미희 대표님이 영화 이야기를 먼저 꺼내주셨다. 이런 책이 있는데 한번 해보지 않겠는지. 그 전에 영화 ‘숨바꼭질’은 재밌게 봤고, 뿐만 아니라 대본에 많이 와 닿았다. 감정선이나 여러 가지에 모성애가 잘 살아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욕심이 났다.”


‘장산범’ 포스터를 보면 제목 위로 ‘숨바꼭질의 허정’이라는 문구가 시선을 모은다. 보통 이런 표현은 어떤 작품이 과거 큰 화제를 모았고, 그 작품의 주역이 현 작품에 참여했을 때 사용되는 것이 대부분. 이번 경우에는 ‘숨바꼭질’의 허정 감독이 홍보의 도구로서 ‘장산범’의 광고에 사용되고 있다. ‘숨바꼭질’은 배우 손현주 주연의 2013년 개봉작. 한때 대한민국을 두려움에 떨게 한 초인종 괴담을 다루며 누적관객수 560만 4천106명을 기록했다.

허정 감독에 관한 기대가 컸는지 묻자 염정아는 “‘숨바꼭질’은 보고 나면 후유증이 오래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 문 꼭 걸어 잠그고, 주차장에 혼자 있는 것도 무섭고, 엘리베이터 혼자 타는 것도 무섭고”라며 감독의 전작을 회상했다.

이어 그는 “그런데 이 이야기를 왜 했지? 아, 우리 감독님!”이라는 말로 취재진의 웃음을 모은 뒤, “그런 무서움을 감독님이 굉장히 잘 집어내시는 것 같다. 어떤 상황에 놓여야 사람이 공포를 느낄 수 있는지. 그래서 ‘공포 쪽으로 감독님이 잘해주실 테니까, 나는 희연이의 모성애 연기만 잘하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감독에 이어 배우 박혁권을 이야기의 장(場)에 끌어냈다. 염정아는 “정말 궁금했다”라는 말로 박혁권 캐스팅을 떠올렸다. “박혁권 씨는 현장에서 어떻게 연기를 하실지 궁금했다. 볼 때마다 항상 다양한 캐릭터를 잘 소화해내시더라. 민호는 어떻게 표현하실지 궁금했는데, 박혁권 씨만의 스타일로 잘 해내신 것 같다.”

또한, 두 배우 간의 ‘케미’를 묻자 “안 맞는 부분은 없었다. 그러면 잘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홍보하면서 많이 친해졌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홍보를 통해 배우가 친해지는 것이 역설적이라고 말하자 그는 감정적으로 힘든 영화를 찍다 보면 마주 앉아서 농담할 시간이 없다고 밝혀 모두를 실소케 했다.


희연은 아들을 잃고, 딸을 얻고, 가족을 잃는다. 중심은 아이다. 2006년 결혼해 두 아이를 두고 있는 염정아에게 모성애 연기의 수월함을 묻자 “아무래도”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어 그는 작품의 결말을 칭찬했다. “처음부터 결말이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 결말이 너무 좋아서, 사실 선택하는 데 크게 작용을 했다. 결말까지 희연의 감정을 처음부터 차곡차곡 쌓아가는 과정이 ‘연기 한번 도전해볼만 하다’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기자도 이에 동의하는 바다. 장산범에 대항하는, 장산범을 아우르는 힘은 결국 희연이었다. 전면에 나서는 것은 범이지만, 범의 존재는 희연을 돋보이게 만든다.

캐릭터와의 일체화와, 힘듦을 이야기하자 염정아는 “우리 애를 잃어버리면 어떨지 생각은 안 들고, 책을 읽다 보면 희연의 상황에 들어가게 되더라. 굳이 나를 대입시키지 않아도”라고 답했다. 배우 스스로 희연이 되는 것 아닌 희연이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새로 만드는 것인지 되묻자 그는 “맞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삶이 너무 힘들 것 같다”라고 강조했다.


가까이에서 본 염정아는 쾌활하고, 털털하고, 이와 비슷한 단어라면 무엇이든 그를 꾸밀 수 있는 배우였다. 하지만 낯설지 않고 심지어 익숙했다. 방송에서 만났던 바 있는 그의 대중 친화적인 면과 인터뷰 현장의 염정아는 다른 점 하나 없이 동일했기 때문.

인터뷰 당일 오후에 방송될 JTBC ‘한끼줍쇼’ 이야기를 꺼냈다. ‘한끼줍쇼’는 제목 그대로 방송인이 일반 가정의 초인종을 누르며 저녁 한 끼의 동참을 부탁하는 예능. “정말 좋아하는 프로그램인데, 방송이랑 정말 똑같더라. 전혀 설정된 것 없고, 재밌었다. 리얼이다. 미리 설정해 놓는 것 하나 없이 카메라가 따라다니기만 했다.”

배우와 예능의 결합은 시너지를 낳지만, 배우 대신 예능인으로 강제 전업되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만들기도 한다. “예능을 꺼리진 않는지?”라는 질문은 그래서 나왔다. 그는 “원래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니까 잘 못한다. 힘들더라. 하지만 어렵더라도 재밌다. 재밌긴 하더라.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니까”라며 미소 지었다. 반작용에 대해서는 “생각이 그렇게, 앞을 많이 못 가는 스타일이다. 당장 눈앞에 것만 본다”라며 본인의 즉흥성을 소개했다.

과거 염정아는 예능 MC까지 넘보기도 했다. 스토리온 ‘트루 라이브 쇼’가 그것. “내가 잘 못하더라. 의욕은 넘쳤다. 하지만 진행이 쉽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많이 했다. 쇼 프로그램 진행도 하고. 그때는 발랄함으로 했는데, 내가 토크는 약하더라.”

인터뷰 중간 염정아는 주위에서는 그를 상당히 웃긴 사람으로 알고 있다고 자랑했던 바 있다. 이를 언급하자 그는 “그냥 사석에서 웃기는 것과 누군가에게 뭘 끌어내서 이야기를 주도해 가는 것은 다르다. 못하겠더라. 말재주도 별로 없고”라며 겸손을 표시했다.


배우 염정아, 희연 역의 염정아를 실컷 논했으니 이번에는 엄마 염정아가 궁금했다.

“밤을 못 샌다. 촬영을. 밤을 못 새고, 뒤로 계속 넘어간다. 예전에는 밤을 새도 그 다음날 생생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체력적으로 나이를 느낀다. 그리고 애들 커가는 모습을 보면 시간이 빨리 간다는 것을 느끼고.”

세월의 무상함을 속상해하는 그에게 자녀 이야기를 물었다. 두 아이는 현재 초등학교 2학년과 3학년, 연년생이란다. 공개 수업도 빠짐없이 나간다고.

어떤 엄마인지 자평을 부탁하자 염정아는 “많은 것을 같이 하는 엄마다.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재밌게 해주려고 하고, 공부하라는 소리도 많이 하고”라며, “일이 없을 때는 하루 종일 붙어 있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원 라이딩도 하고, 보통의 엄마가 하는 것은 다 한다”라고 평범성을 알렸다. 그는 “놀아주는 것도 일이고, 스케줄 짜는 것도 힘들고”라며 한탄했다. 하지만 행복이 보이는 것은 왜였을까.

일상을 영화 장르에 비유해 달라고 부탁하자 시트콤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영화로 표현하면 약간 시트콤? 사고를 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재밌게 사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더불어 염정아는 “아이들이랑 있으면 생각치도 못한 재밌는 상황이 생긴다. 그래서 항상 즐겁다. 예를 들어 아이가 엄마한테 사진 찍어준다고 할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막 포즈 잡고 하는데, 괴물로 만드는 앱으로 전부 찍어 놓는. 입이 여기 가 있고, 저기 가 있고. (웃음) 그런 상황이 재미난다. 얼굴 바꿔놓기, 애들은 그런 것에 자지러진다.”

이 순간만큼은 영락없는 ‘동탄 맘’ 염정아였다.


대중에게 염정아는 배우다. 그것도 보통 배우 아닌 ‘연기 잘하는 배우’. 단순히 27년 차 중견 배우기에 더해지는 수식어일 수 있지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두 차례나 받은 것은 이것이 허성이 아님을 증명한다. 2007년에는 영화 ‘오래된 정원’으로, 2015년에는 ‘카트’로 상을 거머쥐었다.

대중이 염정아에게 좋은 연기와 나쁜 연기를 구분하는 대신 어떤 연기를 펼쳐내는지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는 상황. 위험한 생각이지만, 어쩌면 갖춰진 연기력과 함께 관성적으로 작품을 촬영할 수도 있는. 이 가운데 무엇이 그를 연기적으로 각성시키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그렇게까지 봐주시는 줄은 몰랐다. 연기 잘하는 타이틀을 갖는 것이 목표인데”라며 놀라움을 표시한 뒤, 이어 “연기에 관해서 칭찬을 받으면 자극이 된다. 더 좋은 작품 만나서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라고 칭찬을 각성의 원천이라고 밝혔다.

이에 더해 ‘장화, 홍련’ 때의 염정아와 ‘장산범’의 염정아가 서로를 만난다면 어떨지 묻자 다시 한번 칭찬을 답으로 내세웠다. “항상 거창한 계획을 세우진 못하더라도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는 모토를 가지고 있다. 열심히 살라고 서로 칭찬해줄 것 같다.”

‘포령경무(褒令鯨舞)’.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뜻의 사자성어다. 누군가의 친절한 마음이 타인에게 전달될 때 작은 물결은 큰 파도가 되어 세상을 움직인다.

염정아는 칭찬에 감사하고, 칭찬을 희망하며 그를 춤추게 할 힘을 기자에게 꺼냈다. 염정아에게 건넨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칭찬 하나. 과연 칭찬은 복제되어 관객 역시 염정아를 칭찬할 수 있을까. 아니, 확장되어 관객은 염정아의 영화 ‘장산범’을 칭찬할 수 있을까.

그는 애착 가는 작품으로 ‘장화, 홍련’ ‘오래된 정원’ 등 대중에게 인정받은 영화를 주로 제시했다. ‘장산범’ 역시 애착을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영화는 8월17일부터 상영 중이다. 100분. 15세 관람가. 손익분기점 170만 명. 제작비 38억 원.

+α. ‘장화, 홍련’을 봤다.

2017년 여름 극장가는 과거 한국 영화를 상기시키는 데 특화된 작품이 여럿 관객 곁을 찾아온다. 영화 ‘청년경찰’은 ‘투캅스’를, ‘장산범’은 ‘장화, 홍련’을 기억 속에서 불러낸다.

김지운 감독의 2003년작 ‘장화, 홍련’. 장르가 공포인 점, 염정아가 엄마 역을 맡는다는 점, 외딴 집이 배경인 점 등 여러 요소가 14년 전 영화를 돌이켜보게 만든다.

그래서 ‘장화, 홍련’을 다시 봤다. 염정아는 ‘장화, 홍련’에서는 계모를, ‘장산범’에서는 절절한 모성애를 지닌 친모를 연기했다. 둘 모두 모(母)가 들어가지만 전혀 다른 역할이다. 또한, 염정아는 두 영화를 통해 불로술(不老術)을 보여준다.

공포물이자 반전(反轉)물인 ‘장화, 홍련’에서 새어머니 은주(염정아)는 영화가 시작되고 정확히 12분 1초 만에 “어머, 너희들 왔구나. 어서와. 이게 얼마만이니”라며 수미(임수정)-수연(문근영) 자매를 반갑게 맞이한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사포처럼 내뱉는 말에는 가시가 돋아 있다. 손톱을 깨물고, 신경정신과 약을 먹고, 수연을 옷장에 가두고.

영화의 종반부 은주는 수연에게 다음을 이야기한다.

“너,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뭔가 잊고 싶은 게 있는데,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싶은 게 있는데, 도저히 잊지도 못하고 지워지지도 않는 거 있지. 근데 그게 평생 붙어 다녀.”

‘장산범’이 외부에 기인한 공포극이라면 ‘장화, 홍련’은 내부에 초점 맞춘 심리극이다. 그리고 대사는 이병우의 ‘돌이킬 수 없는 걸음(No Path Back)’과 함께 완성된다.

‘장화, 홍련’이 개봉한 2003년은 충무로의 르네상스였다.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가 모두 같은 해 개봉했다. 김지운, 봉준호, 박찬욱. 르네상스는 언제 다시 찾아올 것인가.

지난해 안철수 의원은 대기업의 문화 수직계열화를 막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2017년 7월 문화체육관광부는 대기업의 영화 배급과 상영을 분리하는 안을 검토 및 적극 추진토록 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6월 미래산업전략연구소와 ‘영화산업에 대한 시장분석’ 연구 용역 계약을 체결했다. 문화의 다양성은 획일화의 거부에서 시작된다. 지금은 어떤가?(사진제공: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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