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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독립운동가 '이종희' 선생의 공훈

김희정 기자
2009-09-01 10:10:12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이종희 선생을 2009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9월1~9월30일까지 개최한다.

이종희는 1890년 4월19일, 전라도 금구현 귀미란 마을(현 전북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남정, 독립운동 초기에는 이인홍이라는 이름을 쓰다가 1926년 이후부터 이집중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고향에서 청년기를 보낸 선생은 1919년을 전후해 중국으로 망명하면서부터 독립운동가의 삶을 시작했다. 망명후 선생은 일제 식민수탈기구의 파괴와 일본 고위 관리나 친일파의 처단을 활동 목표로 하는 의열단에 정식단원으로 가입해 의열 투쟁에 동참했다.

1925년 북경, 유자명의 지시로 일제의 밀정 김달하를 처단. 의열단의 독립운동 노선 전환에 따라 1926년 1월 광주(廣州)로 이동했다. 이후, 10여 명의 의열 단원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제4기 보병과에 입학했으며, 재학 중에는 재광동조선혁명군인회와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참여해 활동했다.

1926년 10월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중국군 소위로 임관됐으며, 남창 주둔 중국군 부대에 배속되어 근무하면서도 의열단 남창지부원으로 활동했다. 1932년 남경으로 근거지를 옮긴 의열단은 혁명 간부 겸 항일투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를 설립, 선생은 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한인청년 사관 양성에 힘썼다.

의열단은 조선혁명간부학교 운영으로 다수의 청년투사를 양성하면서 조직의 위상을 재확립하고 항일운동 역량을 강화하는데 성공했다. 1933년부터는 본격적인 대동단결체 결선운동을 주도, 1935년 7월 중국 관내의 민족유일당으로서 민족혁명당 창립을 이룰 수 있었다.

선생은 1937년 민족혁명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며 김원봉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이끌어 갔다. 1938년에는 조선혁명간부학교 졸업생을 포함한 100여 명의 정예요원으로 구성된 조선의용대 창설에 참여하여 총무조장으로 임명됐다.

선생이 참여했던 조선의용대는 직접적인 항일전을 위해 화북지역으로 이동을 결의하고 1941년 초 황하를 건너 태항산 일대로 이동했다. 그 후 조선의용대의 잔류 병력과 본부 요원은 1942년 12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됐고, 이 때 선생은 제1지대 총무조장으로 임명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조선의용대의 한국광복군 편입을 이룬 직후 민족혁명당의 참여도 추진했다. 그 결과 1942년 제34차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선생은 민족혁명당 소속의 전라도 출신 의원으로 당선됐다.

1943년 김원봉의 후임으로 한국광복군 제1지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던 중 선생은 폐병을 얻게 됐다. 중경은 양자강과 가릉강이 만나는 지역이면서 분지지대로 1년 내내 안개가 끼는 고온다습한 날씨가 계속됐다. 이런 기후 탓에 우리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은 폐병을 앓고 아까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병상에서 광복을 맞이한 선생은 1946년 4월29일(음 3월28일) 환국하는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으나, 검역과 상륙 수속을 기다리던 중 광복된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선상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독립기념관에서는 이와 관련해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자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 자료를 9월 한 달 동안 전시할 계획이다.

한경닷컴 bnt뉴스 김희정 기자 life@bn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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