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디자이너 릴레이 인터뷰] 홍은주 ②

이선영 기자
2009-07-01 17:36:46

이화여자대학교 미대에서 인테리어를 전공한 그가 패션에 눈을 뜬 것은 1980년대 초반. 삼남매에게 직접 옷을 지어 입히기 위해 복장학원을 다닐 정도로 감각이 뛰어난 어머니를 그대로 닮은 그는 대학 졸업 후 인테리어 회사에 다니면서 취미삼아 직접 옷을 만들었다.

옷을 만드는 작업을 통해 점점 패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본격적인 패션 공부를 위해 늦깍이 파리 유학을 결심. 그가 입학한 파리의 패션전문학교 ‘에스모드(Esmod)’는 그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제공해 주었다.

"이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덕분에 1987년 파리의 패션 명가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에 입사해서 디자이너로 일할 수 있게 됐어요. 외국인으로선 매우 드문 일로 저에게는 큰 행운이었죠"

에스모드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외국인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동기들을 제치고 크리스찬 디올에 유일하게 입사해 재능을 인정받았다.

크리스찬 디올에서 일하면서 벨기에의 캐쥬얼 웨어 브랜드인 ‘하우스’와 연결 되어 프랑스와 벨기에를 일주일에 한 번씩 왔다 갔다 하고, 독일의 레이스 회사에서 레이스 디자인을 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쟈바 시장에 디자인을 팔고, ‘Depech mode’라는 프랑스 유명 잡지에 일러스트를 팔기도 하면서 디자이너로써의 경험을 쌓았다.

1992년, '홍 컬렉션'이라는 브랜드로 파리 컬렉션에 참가한 그는 한국인 최초로 파리 레알에 자신의 브랜드인 ‘오제’ 컬렉션을 오픈하고, ‘프레타포르테’에도 세 차례 참가하면서 주목 받았다.

"겁 없이 뛰어들긴 했지만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실감했어요. 이때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가 들더라고요"

그는 고국을 떠난 지 13년 만인 1997년 7월 한국으로 돌아와 압구정동에 샵을 냈다. “그런데 그해 11월에 IMF가 터졌어요. 한 달 동안 단 3명의 손님이 왔었죠. 보조 디자이너 월급도 못 주겠고 그렇다고 문을 닫을 수도 없고 정말 앞이 깜깜했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패턴을 뜨고 손바느질로 만든 옷들을 저희 샵뿐만 아니라 근처의 다른 가게들에 위탁판매를 해야 했죠. 유난히 춥고 힘든 긴 겨울이었어요”

1998년 그는 서울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미니 컬렉션을 선보였다. 일상적인 쇼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기획은 당시에 큰 화제가 되었다. 랩과 타악기 연주 등의 생음악과 모델들의 검정고무신, 그리고 모든 옷들을 리폼과 손바느질 위주로 제작해서 ‘새로운 브랜드의 탄생’을 표현했다.

이로써 그는 국내 패션계에 새 바람을 몰고 왔다.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움과 에너지를 보여주는 벨기에 출신 디자이너 마틴 마르지엘라를 좋아한다는 그는 "스스로가 느끼고 원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제가 만든 옷을 입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디자이너로서의 보람을 느껴요"라는 그는 허황된 꿈을 가지고 패션계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에게 “재능을 가진 인재들이 쉽게 포기해 버리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워요. 디자이너의 길은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차근차근 공을 들여야 성공 할 수 있어요”라며 충고했다.

“크리스찬 디올이나 샤넬처럼 100년의 전통을 이어갈 토종 명품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초석 역할을 하고 싶다”는 그는 “앞으로 서울컬렉션에 계속 참가하면서 일본과 미국 등 해외 컬렉션을 통해 한국 패션을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한경닷컴 bnt뉴스 이선영 기자 goodluck@bn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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