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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사람과 사랑을 노래하는, 타이거 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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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 기자] 타이거 JK는 무엇이 되든 간에 자기 자신만은 잃지 않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이 순간을 직면해야 했으며, 성취해야 했고, 사랑해야만 했다.

JK의 행보를 되짚어 보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그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놀랄 만큼이나 일관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 됐든, 장르가 됐든, 혹은 시대가 됐든 간에 말이다. 1999년 처음 마주했던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부터 이번에 발매한 신곡 ‘호심술(Love Peace)’까지, 형식도 한계도 없이 자유롭게 써 내려간 결과물은 이토록 무구하며 선명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음악을 대하는 순수한 감정만이 지금의 보폭을 대변했을지도 모른다.

“‘힙합 선구자’라는 타이틀요? 물론 감사하죠. 하지만 제게는 과분한 찬사에요” 타이거 JK는 한껏 타오르던 시작점에 있었음에도 잇따른 찬사가 멋쩍은 듯 웃어넘겼다. 음악에 몰두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지난날, 꽤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여전히 잊지 않고 그 가치를 새겨 나가고 있는 듯 보였다.

물론 그런 JK에게도 어둔 위기는 존재했다. 본질을 이해할수록, 그리고 그 열망에 가까워질수록 책임감은 그림자처럼 피어났지만 당시의 그는 헤아릴 수 없이 무너져 내렸다고.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침묵 속에서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금 은현할 수 있었다. 공백기를 딛고 일어선 그에게 사랑은 평생의 무게가 됐고 과제로 남았다. 때론 영예로웠고 때론 가혹한 시간이었지만 타이거 JK는 자기 자신의 시간을 되찾아 곧바로 정착해나가기 시작했다.

촬영장에서 다시 만난 그는 곧은 내면과 부드러운 외면을 함께 겸비하고 있었다. 이번 화보 촬영 콘셉트는 1963년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워싱턴 연설에서 따온 ‘Life, Liberty, and Happiness(인생, 자유, 행복)’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진행됐다. JK는 세 가지 콘셉트를 통해 극적인 면모를 드러냈으며, 촬영장 속에서 유연한 얼굴로 금세 녹아들었다.

Q. 오늘 화보 콘셉트가 ‘Life, Liberty, and Happiness’다. 최근 선보인 신곡 ‘호심술(Love Peace)’에 맞춰 새로운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싶었다. 소감은 어떤지

“개인적으로 화보 촬영 자체를 즐기는 편이다. 뮤직비디오나 화보 촬영을 하면 내가 배우는 아니지만 어느 콘셉트에 스며들어서 생각지도 못한 결과물을 갖게 되지 않나. 그것에 희열을 느끼곤 한다. 오랫동안 화보 촬영을 하지 못한 만큼 반가웠다”

Q. 곡의 메시지도 물론 이색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 뮤직비디오 영상미가 인상 깊었다. 영월 선암마을에서 촬영했다고 들었는데

“‘호심술’, 몸을 보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보호해야 한다. 요즘 아시안 혐오 범죄가 굉장히 많이 늘고 있는데, ‘아시안 스피릿(Asian Spirit)’을 3분 안에 다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힙합을 통해서 그것을 부각해보고자 했다. 아시안은 평화 지상주의적이지만 화가 난다면 굉장히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3절에 ‘무신 이순신의 분신 쌍검에 눈부신 빛에 굴절 protection’라는 가사가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무서운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라고 생각했다. 마음 같아선 거북선도 직접 만들고 바다 위에서 촬영하고 싶었는데 여건상 뗏목을 활용해서 촬영하게 됐다. 영월 선암 마을은 사진만 촬영해도 그림이 나올 정도로 명경인 곳이다. 다른 뮤비 촬영이 있어도 꼭 한번 다시 가보고 싶을 만큼(웃음)”

Q. 영월 선암 마을에서 어느 정도 협조를 많이 해준 건가

“정말 감사하게도 영상 촬영 협조를 기꺼이 도와주셨다. 원래 관광객들의 방문으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인데 요즘은 시기가 시기지 않나. 그런 와중에 촬영을 재개하니 주민분들도 다들 좋아해 주시더라”

Q. 신곡을 낸 계기에 대해 ‘인종차별 속 살아가는 동양인으로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라고 밝힌 적 있다. 아무래도 직간접적으로 느낀 경험들이 영감이 되어 굳혀진 게 아닐까 싶었다

“국내에서는 피부로 직접 와닿아 느끼기 어렵겠지만 세계적으로 아시안 혐오 문제가 널리 퍼져 있다. 나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신 발언을 하는 것에 있어서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저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감정을 표출해보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화풀이를 음악으로 푸는 사람이니까. 필굿뮤직이 지향하는 음악은 자극적인 것보다는 기분 좋아지는 음악, 우리가 죽더라도 지구의 좋은 에너지가 되는 음악을 남기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그와 반대로 분노를 표출하는 음악은 어떨까 싶었다”

“인종차별은 사실 밖에 나가면 공기를 마시고, 목마를 때 물을 마시는 것처럼 만연하게 퍼져있다. 그 정도에 따라 사태가 달라지는 거지 혐오에 대한 감정은 굉장히 보편적인 거다. 내 경험을 빗대자면 과거 미국 생활 도중 백인들과 싸우다가 경찰들한테 잡혀 우리만 끌고 간 적도 있을 정도로 천편일률적이다. 그러다 싸움의 마지막은 언제나 ‘Go Back to Your Country(너의 나라로 떠나라)’였다”

“이런 직간접적인 경험은 꽤 오래전이고, 2020년대에 이르러서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아시안 혐오 감정이 심화된 것을 느낀다. 얼마 전 트럼프 전 대통령이 ‘China Virus(중국산 바이러스)’라고 칭한 것에 대해 큰 충격을 느꼈다. 당연히 미국인들 또한 이번 사태로 인해서 사회적으로 큰 부담을 느꼈겠지만 저 말 하나로 아시안 혐오 범죄가 굉장히 확산됐다. 미국인 50%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 저런 말을 했다면 그 지지자들은 곧이곧대로 따르기 마련이다. 이후로는 식당에서도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놀림 받거나 쫓겨나고, 지나가는데 차 타고 다니는 젊은 친구들이 욕하는 등 정말 20세기 초에서나 볼 법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거다. 그런 인종 혐오 관련된 사건들을 접하면서 일이 손에 안 잡히더라. 다시 말해서 ‘호심술(Love Peace)’은 그런 분노의 감정을 집약적으로 나타낸 곡이다”

Q. 사실 어떻게 보면 곡 자체에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다. 이것으로 인해서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되진 않을까 걱정은 없었나

“생각나는 음악을 그때마다 감정적으로 표출하는 동물이다 보니 그런 걱정은 없었던 것 같다. 배가 고파서 라면이 너무 먹고 싶으면 그것에 대한 애절함을 가사로 써 내려가는 것처럼 감정적으로 느끼는 그대로를 적어나가길 뿐이다. 이번 신곡 또한 같은 맥락이다. 나는 정치적인 사람도 아닐뿐더러 내 가족, 친구들에게 부딪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했던 곡이기 때문에 망설임이 없었다”

“이런 걱정은 있었다. 감정은 충실해도 다른 수식어들이 붙으면서 제3의 주제가 되진 않을까 고민했던 것 같다. JK가 소신 발언을 했다느니 내가 정치적,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 치중될 수 있지 않나.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흑인과 동양인의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한 소리를 내면 그 순수함이 변질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복잡한 감정을 느끼면서 준비한 곡이지만 오히려 공개되고 나서 부정적인 반응은 아직 없다. 대부분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시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다(웃음)”

Q. 유명 음악 평론가 서병후의 아들, 미국 생활, 베벌리힐스 고등학교 학력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배고팠던 적이 없을 거라는 색안경도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누구나 다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티스트로서 나의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을 신념으로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것들에 대해 연연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 기억으로는 아버님께서는 빌보드 특파원 직무를 하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녀야 했고 직접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인스타그램이나 구글 같은 플랫폼도 없었으니까. 취재하기 위해서 집에 계시는 날이 거의 없었다. 날 돌봐주실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학교생활을 시작했고, 그때부터 인종차별 등 힘든 상황을 겪어나가야 했다. 그러던 도중 이러다 정말 큰일 날 것 같다고 생각하셔서 베벌리힐스 고등학교에 보내진 거다”

Q. 어떻게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안정적인 삶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듯한데

“굉장히 멀다(웃음). 그래서 힙합에 더욱 빠지게 된 걸 수도 있고. 그때는 갱들 간의 전쟁도 흔할 때였기 때문에 주변 친구가 죽었던 적도 있고, 종신형을 받은 친구도 있을 정도였다. 나뿐 아니라 당시 미국 교포 세대들은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만 달콤한 모습이지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거다”

Q. 작년 딩고 프리스타일 ‘킬링 벌스’에서 인상 깊은 활약을 보여줬다. 댓글을 살펴보니 그중 ‘모든 영역엔 선구자가 있고, 시간이 지나도 선구자의 땀과 눈물 그리고 영광은 지지 않는다’라는 찬사가 눈에 띄었다. 힙합이라는 장르를 도전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은 없었나

“정말 과분한 찬사다. 아무리 그 어려움을 표현한다고 한들 별로 와닿진 않으실 거다. 예로 들자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런 문화적 개념 자체가 없는 곳에 정착했다고 느끼면 되지 않을까. 그냥 방법이 없었다. SNS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찾으러 다니는 것에 족했다. 방송 매체에 이 음악을 알리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공연을 통해 30명, 40명 이렇게 리스너를 점점 늘려나가게 된 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힙합의 선구자다’라든지 그런 것들에 대한 자의식은 전혀 없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미래도 같은 생각일 거다. 그냥 열심히 걷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아무것도 없던 미개척지에 힙합을 심었다고 해서 어떠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그때는 우리가 정말 사랑했던 음악, 장르에 대한 열망만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힙합 대부’나 ‘힙합 선구자’라는 댓글을 읽다 보면 정말 감사한 마음이지만 민망함이 더욱 크다.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Q. 그렇다면 언제 처음으로 ‘내 음악이 긍정적으로 흘러가고 있구나’를 느꼈는지

“사실 내 음악의 흐름에 대해 긍정적으로 느꼈던 건 많지 않다. 지금까지도 말이다(웃음). 이젠 힙합이 언더그라운드 음악에서 올라와 대중문화 음악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스케줄이 생기면 힙합 대표 뮤지션으로 대우를 해주시지만 그 과정은 전혀 녹록지 않았다. 매번 앨범을 낼 때마다 망할 거라는 생각으로 냈고, 비주류 문화의 아티스트로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만드는 것 자체가 재밌었고, 공연 때마다 30명, 40명씩 늘어가는 팬들을 볼 때마다 ‘긍정적으로 흘러가고 있구나’를 느낀 것 같다. ‘우리가 정말 잘됐구나’가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음악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생겼구나’라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우린 충분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공연을 마친 뒤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는 도중 관객 세 분을 만난 거다. 그러면 ‘오늘 와줘서 고마웠다. 다음엔 다른 곳에서 공연하는데 꼭 와달라’ 하며 인사했던 경험이 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희열을 느끼고 감사함을 새기는 거다”


Q. 그때 당시에는 힙합이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나

“물론이다. 그때는 오직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독자적으로 풀 것인가에 대해 빠져있을 때였다. 예를 들어 가리온의 방식을 따라 하지 않고도 나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처럼 무언가 유니크한 요소가 필요했다”

Q. 그러면 ‘랩을 통해 인기를 얻어야겠다’가 아닌 ‘나만의 독자적인 음악을 만들겠다’가 목표였겠다

“그렇다. 가사 속 내 목소리만 듣고 ‘이건 JK다’라고 말하는 이들을 보면 기쁜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애초에 우리 음악은 대중문화 음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느끼기도 했고. ‘Good Life’가 처음으로 1위를 거머쥐고 음악 방송에 초대가 될 때도 어안이 벙벙했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결과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고 경쟁자의 위치에 있던 이들도 힙합을 하는 이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좋아해 주고 축하해줬던 기억이 있다. 자기 곡이 아니더라도 힙합이라는 장르가 대중문화 속으로 진일보했을 때 다들 기쁜 마음이었던 거다”

Q. 내 음악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대하는 태도나 신념에 변화가 일어나기도 했나

“이건 어느 정도 정해진 수순이 있는 것 같다. 처음엔 ‘내가 제일 잘해’라는 자신감에 갇혀 있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감정을 전파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이 곡 때문에 죽고 싶은 마음을 멈췄다’라는 쪽지를 받게 될 때도 있는데 그 순간 모든 관념적 양상이 변해버린다. 싯다르타가 많은 명상을 겪고 난 뒤에 붓다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티스트는 감정을 소재로써 표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틀에 갇히게 되면 표현하는 방식 또한 한정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사연을 듣게 되면 그 순간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 노래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 음악이 누군가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에 큰 책임감을 안게 되는 거다. 그런 것들이 점차 생기더라”

Q. ‘드렁큰 타이거’로만 10개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다. 내가 알기론 한국 힙합 뮤지션으로서 최초로 10집을 발매한 그룹이라고 들었다. 올해 에픽하이가 정규 10집을 내기 전까지 그 기록은 깨지지 않았고. ‘드렁큰 타이거’라는 그룹명을 1인이 되어서라도 끌고 간 이유가 있다면

“‘드렁큰 타이거’는 사실 다양한 아티스트 친구들과 함께 활동하는 클랜 명이었다. 멤버들이 나간 뒤 새로운 이름으로 출발할 수 있었지만 저버리지 않았던 이유는 옛 멤버들, 팬들과의 약속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후 ‘이제 이걸 묻어야 할 때가 왔구나’라고 느꼈을 때 10집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마무리하게 된 거다”

Q. 최근 타이거 JK의 디스코그래피를 돌려 들으며 이런 메모를 적었다. ‘틀을 깨려고 했던 그 작은 움직임이 이제는 힙합계의 큰 틀이 된 순간’이라고. 90년대 전무했던 한국 힙합의 중심점은 드렁큰 타이거와 타이거 JK에 의해 새겨졌다고 믿는다. 이에 대한 책임감은 없었나

“시기에 잘 맞춰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다는 점에 큰 감사함을 느낀다. ‘힙합’ 하면 나를 떠오르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힙합의 시장이 더 커질 수 있게, 우리에게 반감을 갖지 않게 최대한 단정하게 다니자는 마음으로. 예능 방송을 나가더라도 양복을 차려입고, 행동을 조심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런 과정에서 다른 아티스트들도 이 행보에 동참해주셨고 다들 존중해주셨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행동 자체가 쿨해 보이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 좋은 차와 좋은 집, 화려한 라이프 스타일이 아니면 히피 같은 모습이 되더라. 난 그런 모습이 안타까웠다. 화려한 물적 자산 말고도 그에 비견될 만큼의 명예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예술을 하는 데에 있어서 돈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된다면 다들 불행해지지 않을까, 더 큰 가치를 찾을 수 없는 걸까 생각하며 그 씬을 잠시 떠났던 것 같다. 그때는 이런 얘기를 하면 어딘가 꼰대처럼 보이기에 십상이었으니까. 요즘에 들어서는 이런 두 가지 의견 모두 존중받는 시대가 되었다는 걸 느낀다. 특히 젊은 친구들에게 내가 꿈꾸는 세계에 대한 응원 메시지를 보면 감회가 남다르다. 열심히 외치다 보면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점차 생기기 마련이다(웃음)”

Q. 시간이 지나면 꺼내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지 않나. DJ 샤인은 탈퇴 이유에 대해서 당시 음악적 노선의 차이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지

“사실 음악적인 노선의 차이는 결코 아니었다. 당시엔 내가 곡의 가사를 다 썼다. 그 친구의 마음가짐, 라이프스타일, 목소리 톤에 맞춰서 가사를 만들어주곤 했는데 이런 과정들이 점차 버겁게 느껴지는 거다. 서로의 고민도 컸을 거고. 나는 대중들에게 유치하다고 욕먹어도 내 가사는 꼭 내 손으로 써야겠다는 입장인 반면에, 그 친구는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더라도 좋은 결과물을 만들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다가 2집에 들어서 그 격차가 크게 벌어지게 됐다”

Q. 힙합이라는 음악을 시작하면서 실망하고 무너졌던 부분

“매일매일 실망한다(웃음). 순수한 사랑으로 시작한 음악임에도 이 바닥의 시스템을 알고 나서부터 여러 가지 기분을 느끼게 되는 듯하다”

Q. 그렇다면 반대로 지금까지 철저하게 지켜온 게 있다면

“사랑이라는 가치다. 이 음악, 장르, 문화에 대한 사랑 말이다. 그것만큼은 꼭 순수하게 지켜온 것 같다. 수억 원대의 오퍼를 거부하고 쭉 신념을 지켜온 것에 자랑스러움을 느꼈고, 여전히 그 선택이 올바른 가치였다고 믿는다. 물론 이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버리는 시대가 온 것 같아 슬플 때도 있지만 나와 미래, 동료들은 언제나 순수한 음악을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Q. 아내 윤미래도 비슷한 가치관을 갖고 있나

“그런 부분에선 비슷한 생각이었겠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화성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지구처럼 살 수는 없지 않나(웃음)”

Q. 이젠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Mnet ‘SHOW ME THE MONEY 6’ 때의 프로듀서 싸이퍼 영상은 힙합 팬들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다. 마지막 가사 중 ‘드렁큰 타이거 나 힙합의 이유 ONE’는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쇼미더머니’ 방송 자체가 자기 과시, 경쟁 성향이 짙은 프로그램이지 않나. 그래서 그 무드에 맞춰서 썼던 거다. 나 없이는 힙합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의미로(웃음). 마지막 ‘ONE’은 밥 말리(Bob Marley)가 자주 썼던 가사를 가져 왔다. 평화 지상주의를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 ‘Peace’ 대신 자주 빗대곤 한다”


Q. 당시 아무런 커리어가 없던 일반인 우원재를 발굴해낸 장본인이다. 방송 당시 ‘굉장히 사연 깊고 흡수력 있는 랩을 가진 친구’라고 평했던 모습을 기억한다. AOMG에 들어선 뒤 독보적 행보를 걷는 그를 보면 타이거 JK의 판단력이 엄청났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물론 감사한 말씀이지만 난 ‘발굴’이라는 단어 자체를 안 좋아한다. 그 친구의 팔자였던 것뿐이다. 난 모든 것이 운명을 갖고 태어난다고 믿는다. 이렇게 잘하는 친구의 시초, 목격자로서 그 현장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운 마음이다. 하지만 이때 당시에는 제작진 측에 굉장히 많이 혼났다. 그들이 원하는 스토리가 있었고, 캐릭터들이 있었는데 내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만 뽑았다고 해서 굉장히 불쾌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그때부터 나를 싫어했던 것 같다(웃음)”

Q. 그래도 마무리는 잘 되어서 다행이다

“그렇다. 이때 제작진의 이중적인 행보를 처음으로 느꼈다(웃음). 시간이 지나고 원재가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행동도 달라지더라. 물론 당시엔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것으로 인해 원재나 우리 팀 멤버들이 더 주목받을 수 있었으니까”

Q. 최근 우원재의 행보를 보면 기분이 어떤지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정말 좋다. 조금이라도 내 도움을 통해 잘 될 수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했으면 한다. 어떻게 보면 ‘쇼미더머니’를 통해 얻은 딱 한 가지가 이 친구인 것 같다. 이번 ‘호심술(Love Peace)’도 이미 오래전에 원재와 비비가 가장 먼저 들은 곡이다. 웬만한 신뢰감이 없으면 갓 녹음된 곡을 서로 보여주기 힘들다(웃음). 팬이라고 스스로 외칠 수 있을 정도로 원재의 크리에이티브한 감성을 좋아한다. 비비도 마찬가지다. 둘 다 나이는 나보다 훨씬 적지만 이들이 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곱씹으면 큰 영감으로 남을 때가 많다”

Q.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Good Life’, ‘8:45 Heaven’ 등 타이거 JK 하면 생각나는 곡들이 이렇게나 많다. 그중에서도 본인에게 가장 감사하고 뜻깊은 곡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드렁큰 타이거 5집 ‘내 인생의 반의반’이다. 그 곡을 보면 아버님께서 시간의 영원함에 대해 프리스타일로 쭉 설명해주신다. 그 말씀 덕분에 힘들 때도 위로가 많이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타이틀 곡은 그런 것들이었지만 실제로는 빠르고 임팩트 있는 것들 위주로 선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걸 보면 나는 굉장히 지루하고 심오한 사람인 것 같다(웃음)”

Q. 타이거 JK에게 여러 가지 사건들이 거쳐 갔지만 그중 가장 굵직했던 일은 이전 소속사와의 분쟁이라고 생각한다. 금전적인 손해를 본 것보다도 믿었던 사람을 잃었다는 것에 큰 상실감을 느꼈을 듯한데

“아예 못 느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금전적인 부분에 대한 손실은 사실 별로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그만큼 미래가 욕심이 하나도 없는 친구다. 기사화만 안 될 뿐이지 KBS2 ‘인간극장’ 보고 엉엉 울면서 매번 도울 정도로 정이 많다. 아, 다른 건 다 소박한데 신발 모으는 건 정말 좋아한다(웃음). 어쨌든 그런 우리들이었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의 배신은 충격이 정말 컸다. 그때 당시에 병이 다시 재발하면서 응급실에 실려 갔고, 회복 과정이 굉장히 오래 걸렸다. 설상가상으로 아버님도 돌아가시기도 했고 비지나 미래 둘 다 살림이 무척 어려웠던 시기였다”

“이런 힘든 상황에 대해 호소해도 전 소속사 사람들이 이상한 소문을 잘 만들어놔서 효과가 없었다. 그들 말로는 우리가 의정부에 거대한 집을 만들고 현금을 숨겨놨다고 하더라. 이렇게 입막음해버리니 그걸 일일이 호소하면서 싸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우리끼리 잘살아보자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게 됐다. 죄책감이 무척 컸던 만큼 평소에 안 하던 술을 입에 갖다 대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다다를 정도였다. 그럴수록 정신을 차려야하는데 마음 잡기 쉽지 않더라. 예능 프로그램을 나가도 급급하게 임하다 보니 내 모습 그대로를 보여줄 수 없었다.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고”

“그런 충격을 받은 기억도 있다. 오늘처럼 어떤 매거진에서 촬영 제의가 왔는데 담당해주셨던 분들이 내 오랜 팬이었다고 하더라. 그러고 나서 의상들을 살펴보는데 거의 상반신을 부각한 복장들이었다. 당시의 내 몸은 전혀 관리 되지 못했기 때문에 관계자분들의 표정은 실망 그 자체였다. 나는 정말 아무런 준비를 할 수 없던 상황이니까. 영화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었다. 예능 프로그램이나 화보 촬영을 진행해도 나 자신을 잃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Q. 어떻게 그 위기의 순간을 타개할 수 있었나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만 정말 죽음의 문턱까지 스스로 찾아갔던 것 같다. 너무 이기적인 상황이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였는지 모르겠지만 한순간에 정신을 차리게 됐다. 척수염이 재발하면서 ‘이대로는 죽지도 못하고 짐이 되어 살아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만큼 위축되어 있던 상태였다. 그때부터 극도로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사랑’을 강조하며 살아오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내 행보에 대해 가식적으로 느낄 수 있지만 너무나 힘들었던 때에 사랑으로 극복했던 기억이 있기에 그 가치를 믿는다. 나 자신이 바뀌니 걸어갈 운명 또한 바뀌게 되더라. 때마침 비비가 회사에 들어오게 됐고”

Q. 비비는 타이거 JK의 음악을 좋아해서 들어오게 된 건가

“그렇지도 않다(웃음). 비비의 음악을 미래가 먼저 듣고 찾아가 보자고 해서 가게 된 거다. 그것도 순수하게 한 두 곡 같이 해보고 싶은 마음으로 말이다. 먼 길을 내려가 만나 보니 고등학생이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Q. 그런 걸 보면 윤미래의 선구안이 대단한듯하다

“맞는 말이다(웃음). 물론 나 또한 비비의 음악을 처음 듣자마자 충격적이었다. 분명히 어딘가에서 음악을 전문적으로 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소속사도 없고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은 고등학생이라는 게 신기했다. 무엇보다도 가사 속 단어의 표현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다가 부모님과 자연스럽게 대화하게 됐고, 비비가 의정부로 자주 찾아오면서 교류가 이어졌다. 일하러 오는 게 아니라 정말 놀러온다는 개념으로(웃음). 이후에 다른 기획사에서 비비에게 러브콜을 보냈다는 소식을 들었고, 우리는 순수하게 좋은 소속사를 찾아주겠다는 마음으로 조언을 해주고 싶었다. 그러더니 비비는 ‘나 여기서 할 거예요’라고 당돌하게 말하더라”

“당시는 힙합계에 ‘Flex’ 문화가 가장 최고점을 달리고 있었던 때였고, 우린 그것과는 거리가 아주 먼 곳이었다. 한창 전 소속사와의 분쟁으로 아무것도 없던 시기였으니까 말이다. 나중에 우리와 함께한 이유에 대해 물어보니 그냥 좋았다고 하더라. 그만큼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지내는 사이었다. 처음에는 비비도 고등학생 이다보니 반항심이 좀 있었다. 한번은 그 친구가 ‘SNS를 못하게 하면 계약서 찢고 가겠다’라고 말한 적도 있는데 거기에 난 ‘너 마음대로 해라’라고 답했다(웃음). 우리는 범죄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는 일만 아니면 언제든 솔직하게 행동하라고 말한다”

Q. 2007년 윤미래와 결혼한 이후 서로에게 애틋한 모습을 지금도 보여주고 있다. 윤미래는 본인이 어떤 남편으로 남길 원하는지

“미래는 너무나도 고마운 사람이다. 내가 여러 위기를 겪을 때도 옆에서 묵묵히 있어 준 그런 친구이기도 하고. 나는 힘들어도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편인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당장의 욕심에 휘둘리지 않는 것을 좋아하고 응원해준다. 나 자신을 믿고 나가는 그런 모습 말이다. 이번 신곡이 나왔을 때도 본인이 더 만족한 느낌이었다(웃음)”

Q. 그런 면을 보고 JK를 좋아하게 된 것 아닐까. 둘은 굉장히 오래된 동료지 않나. 5집 ‘편의점’에서도 함께 곡을 작업한 적도 있고. 그때는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없었나

“물론 항상 있었지만 솔직하지 못했다(웃음). 물론 그때는 이기적이었던 것 같다. 내가 해야 할 일만 잘하면 모든 게 따라올 것이라고 믿었다”

Q. 1974년생, 타이거 JK에게 지금의 나이는 어떤 의미인가

“사실 이것에 대해서는 최근에서야 처음 느꼈다. 해외에서는 나이에 관해서 질문들이 이어가지 않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나이를 비석처럼 꽂고 다니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 우리가 나이나 연도에 갇혀서 늙어가는 게 아닐까 문득 생각한다. 나이 들면 나이 드는 거고 할아버지가 되면 되는 것이지 않나. 어떻게 보면 나이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내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지 않나 싶다. 그만큼 내게 47이라는 숫자는 아무 의미 없다”

Q. 그렇다면 2021년 8월 ‘현재의 나’를 가장 잘 표현하는 문장은 어떤 게 있을까

“‘Manifestation Not Anticipation’.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나. 나는 간절히 바라는 것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 기대하는 것보다 이미 실현된 현실에 반응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꼭 한번 되짚어보길 바란다”

Q. 욕심이 굉장히 없는 삶 아닌가

“어떻게 보면 욕심이 굉장히 많은 삶일 수도 있는 거다. 나는 이 문장을 지니고 나서 굉장히 행복해졌다. 오늘 하루 또한 그렇고”

에디터: 박찬
포토그래퍼: 두윤종
의상: MARNI by YOOX.com, CELINE by YOOX.com, THE GREATEST, COS, 비이커
주얼리: 오드콜렛, 핫쉴드, BLACKPURPLE
슈즈: 컨버스
아이웨어: 젠틀몬스터
헤어: PRANCE 이지 부원장
메이크업: PRANCE 예지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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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마디 전체 2,009
황금돼지 2009-02-2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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